(읽기 전에: 스포일러가 있으며 영화 본편이 아닌 소설판 감상이므로 영화에 없는 묘사나 설정, 또는 그 반대의 경우를 언급했을 수도 있다.)
지난 11월 3일 일본에서 고지라 시리즈 신작 <고지라-1.0> (ゴジラ-1.0 / 고지라 마이너스 원)이 개봉했다. 팬이니 만큼 당연히 신작이 궁금하지만 지금으로선 언제 한국에 들어올지 알 수 없어, 아쉬운 대로 개봉 5일 뒤에 출간된 소설판을 읽어 보기로 했다. 고지라에 빠져든 이래 영화 본편보다 소설판을 먼저 확인하는 건 처음이다.
제목에 붙은 ‘마이너스 원’은 폭격과 원폭 투하로 초토화, 즉 ‘제로’가 된 일본에 그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 거대 괴수 고지라가 나타나 ‘마이너스’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고지라 시리즈의 원점인 1954년작 <고지라> 이전 시대를 무대로 한다는 과감한 시도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과감함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초대 <고지라>가 지금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까닭은 작중에 포진한 반핵, 반전 메시지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녀서이다. 반면 [고지라-1.0]이 외치는 그것들은 내용과 좀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핵은 고지라의 기원과 파괴력 확보를 위한 도구에 그치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다시, 또는 마저 해서 결판을 내야 하는 미완의 임무처럼 그려진다. 고지라는 전쟁 재점화를 위한 핑계일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폭도?
초대 <고지라>에서 괴수를 낳은 원인인 핵실험의 주체는 그저 암시되었을 뿐이다. 당시는 원폭 투하로부터 불과 9년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암시만으로도 충분했을 터. 이와 달리 [고지라-1.0]의 극중 현재 시점은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한 뒤 연합군의 군정 치하에 있던 1947년이다. 소설은 오토섬에서 전설로 전해져 온 공룡형 괴수 ‘오이라’ (呉爾羅 / ‘고지라’의 한자 표기. 일본어로는 발음이 같다)가 비키니 환초 핵실험에 피폭되어 ‘고지라’ (ゴジラ)로 돌연변이하는 과정을 굳이 묘사함으로써 주체가 미국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고지라는 이내 보복이라도 하듯이 미군 소속 함선을 다수 파괴한다.
하지만 미국은 고지라 격퇴를 위한 군사행동이 소련을 자극하면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며 책임을 일본에 떠넘겨 버린다. 게다가 격퇴 작전을 위해 종전시 압수했던 구 일본군 군함 여러 척을 넌지시 일본에 돌려줬다는 정황까지 보인다. 더욱 더 이상한 것은 주인공 시키시마를 비롯한 작전 참여자 거의 전부가 구 일본군 출신의 민간인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정부가 안 하니까 우리 민간인이 뭉쳐서 한다!’고 역설하며, 여러 척의 군함과 전투기를 군 지휘체계 그대로 운용하며 작전을 개시한다. 물론 이는 미국의 묵인과 일본 정부의 배후 덕분에 가능했음이 시사된다. 무기 말고도 작전에 필요한 상당량의 장비와 자원을 민간 차원에서 조달하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그럼에도 이 일련의 설정과 묘사는 고지라 영화임을 감안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극중 시대 설정을 굳이 1954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은 지금까지 시리즈에서 좀처럼 보여 주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높이 50.1m의 거대한 괴수가 일본에 재난을 가져온다는 설정부터 비현실적이므로, 실제 역사의 일부가 된 과거를 배경으로 할지언정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고증에 목을 매야만 할 필요까진 없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을 처참한 전화 (제로가 아닌 마이너스)로 몰아넣었던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퇴하여, 그 책임으로 국권과 무기를 빼앗기고 군대가 해체된 나라에서 고작 패전 2년 뒤, 바로 그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이 재집결하여 무기까지 돌려받고 전시에 준하는 작전에 나선다는 이 그림. 마음 편히 감상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초대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고지라 시리즈가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임을 완곡히 강조하는 프로파간다 역할을 해 왔다는 비판도 있고, 전쟁이 불가능한 일본에서 괴수영화와 같은 특촬 스펙터클 영화가 전쟁영화처럼 소비된다는 비평도 있다. 고지라 시리즈 역시 전쟁이 애초에 왜 일어났는지를 다루지는 않으며, 이는 전쟁을 소재로 한 일본 상업영화 전반의 뚜렷한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고지라-1.0]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설픈 가공전기나 대체역사물과 같은 설정을, 그것도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제시하면서 (구) 일본군을 하늘과 바다 위로 다시금 띄워 올린다. 야마자키 타카시 감독은 마치 이렇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전쟁에는 졌지만 고지라한텐 안 질 거거든!’

또한, 고지라의 탄생은 사실 미국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주인공 시키시마는 특공 (자살공격) 명령을 받고 제로센에 타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반드시 귀환하겠다는 부모와의 약속을 핑계로 전선을 이탈한다. 특공 불시착 기지가 있던 오토섬에 내린 시키시마는 그곳에서 자신의 탈영을 개의치않고 따뜻하게 맞아 주는 전우들을 만나지만, 그들 대부분이 오이라의 습격에 희생되고 만다. 시키시마가 제로센의 기총으로 오이라를 사살해 달라는 전우들의 요청을 내치고 또다시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 돌연변이 괴수가 아니었던 오이라를 사살했다면 훗날 고지라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고지라는 시키시마의 업보와도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폭탄을 가득 채운 전투기에 다시 한 번 올라탄다. 어차피 스포일러를 잔뜩 담은 감상이므로 결말까지 이야기하자면, 시키시마는 살아남는다. 고지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면서 자신을 옥죄었던 주박을 (어느 정도) 느슨히 하는 것이다.
고지라 부분을 제외한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은 종전 직후의 피폐한 환경에서 살아가려 애쓰는 유사 가족이 차지한다. 탈영까지 해 가면서 귀환 약속을 지키려 한 시키시마는 부모가 폭격으로 죽고 집도 폐허가 되어 버린 현실에 낙담한다. 암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또래 여성 노리코, 그가 돌보는 고아 아키코와 얼떨결에 함께 살게 된 시키시마는 생계를 위해 전쟁 중 바다에 뿌려진 기뢰 제거 작업을 맡는다. 목조선 신세이마루에 승선한 시키시마는 군 출신의 아키츠와 노다, 그리고 파병되지 않아 군인을 동경하는 미즈시마와 만나 남성끼리의 유대를 맺는다. 이 와중에 시키시마는 오토섬의 비극을 매일같이 악몽으로 되새기는 고통을 겪고, 끝내 노리코가 긴자 한복판에 나타난 고지라 재난에 휘말린다. 이 모든 관계들이 시키시마가 특공 전투기로 돌아가는 클라이맥스를 위한 기능적인 역할에 머문다는 점도 [고지라-1.0]의 한계 (마이너스)이다.
소설판의 서술은 대체로 평이하고 간명하다. 예고편과 각종 홍보 영상으로 본편의 몇몇 장면을 맛보기로 접했기에, 문자의 그물 틈으로 스며드는 영상의 기억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아직 보지 못한 영화로 편집되어 상영된다. 당연히 그것은 실제와는 다른 나만의 상상이 빚어낸 가상의 영화이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소설판이라는 매체의 매력이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니 유감스럽다. 책을 덮고 나자 소설판의 이 모든 마이너스들이 완성된 영화에도 산재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만이 찜찜하게 남는다.
[고지라-1.0] 소설판
원제: 小説版 ゴジラ-1.0
작가: 야마자키 타카시((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긴 했지만, 이를 소설로 풀어 쓰는 작업은 대필 작가가 맡았으리라 짐작된다.))
출판사: 슈에이샤 (오렌지 문고)
쪽수: 196쪽
ISBN: 978-4-08-680525-4
가격: 680엔
발매일: 2023년 11월 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