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Spring)은 ‘H. P.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은 <비포 선라이즈>’라고 홍보되었는데, 제법 구미를 돋우는 문구임엔 틀림없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으로 괴로워하던 주인공 에반이 충동적으로 비행기표를 끊고 날아간 곳은 이탈리아. 그곳에서 매력적인 루이즈와 조우한 에반은 남유럽의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카메라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따라가는 동안, 에반도 우리도 루이즈가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는 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로맨스 드라마와 초자연 공포라는 일견 뜬금없는 조합은 어느 정도 흥미를 유발하는 화학작용을 보여 주긴 하지만, 그것도 딱 중반까지만이다. 이 시점부터 따분한 중언부언과 어색한 연출로 화학작용의 약발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말이 독특하긴 하지만 보는 이를 계속 붙들었어야 할 영화의 감정적 중력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이다.
<스프링>의 잠재력은 재미있는 전제와 몇몇 호감이 가는 장면 정도로 발휘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좀 별난 영화라는 점 만큼은 분명하니, 그래도 시선이 간다면 에반의 여정에 한번 동행해 보시라.
원제: Spring
감독: 저스틴 벤슨, 애런 무어헤드
주연: 루 테일러 푸치, 나디아 힐커, 프란체스코 카넬루티, 제레미 가드너, 닉 네번
북미 개봉: 2015년 3월 20일
한국 개봉: 2016년 6월 23일
(C) Sony Pictures Classics, Venture Forth, Castle Rock Entertainment, Detour Filmproduction, Faliro House Productions
1995년, <비포 선라이즈>. 유레일 열차 안에서 미국인 남성 제시와 프랑스인 여성 셀린느가 처음으로 만난다. 그들은 즉흥적으로 독일 빈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약속된 다음 열차 시간이 되자 그들은 이제 막 피어난 사랑에 몸 달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길을 간다. 9년 뒤인 2004년, <비포 선셋>. 제시는 셀린느와의 추억을 소설로 써 작가가 된다. 홍보를 위해 프랑스 파리의 서점에서 낭독회를 마친 제시 앞에 거짓말처럼 셀린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에도 두 사람은 제시의 임박한 비행기 출발 시각이라는 제한에 맞닥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한층 더 진전된다.
또 다시 9년 뒤, 2013년. 제시와 셀린느는 어떻게 되었을까. 두 사람은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 질문에 대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이선 호크, 줄리 델피의 대답이 바로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이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내가 본 가운데 가장 낭만적인 영화 두 편이었다.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언제까지나 마음에 담아 둔 채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온 두 연인의 이야기.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함께했던 두 번의 만남이란, 시간의 길이만으로는 잠깐의 스침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만남 하나하나의 기회를 소중히 여겼고, 주어진 일 분 일 초를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썼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름다웠고, 20대와 30대를 각각 묘사했던 두 편의 전편은 젊음의 낭만과 그것이 점차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담은 잔잔한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이미 가족을 이룬 40대가 되어 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동반자로 택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 내용은 전처와의 관계라든가 직업이나 정착에 대한 갈등처럼 예전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눈에 보이는 문제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젊지 않다. 아이들도 있다. 즉흥적인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지녔으면서도, 제한 시간이 정해진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라는 설정으로 얼마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던 전편과는 접근 각도가 다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앞선 두 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이 연작이 그토록 매력적인 까닭은 영화가 보는 이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 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각자의 나이에 어울리는 눈높이로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에 동참했고, 또 그들의 산책길을 따라갔던 것이다. 어려운 문제가 끼어들어 두 사람의 차이를 극대화시키기도 하지만, 새끼줄처럼 꼬여 온 세월 사이에 촘촘히 스며들어 있는 그들의 사랑과 추억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제시와 셀린느가 첫눈에 서로를 받아들였던 즉흥적인 낭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매우 소박하면서도 현실적이어서,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것이야말로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이 세 편의 연작을 지탱해 온 미덕이며,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랑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사랑이, 낭만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당신이 밥을 먹는 또 하나의 이유를 알려 준다.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조용히 뒤흔들어 놓는다.
제시와 셀린느를 9년 뒤에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운이 남도록 그냥 두어도 좋을 텐데’ 라고 툴툴거리면서도 우리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 왔다. 전편만한 속편이 없다는 속설이 비교적 잘 들어맞는 편임에도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가끔은 마법 같은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그 만큼은 낭만적이구나 싶다. 모든 것은 링클레이터와 호크와 델피에게 달려 있겠지만 나는 찬성이다. 서로를 잊지 못하고 끝내 함께하게 된 제시와 셀린느. 나와 함께 18년이라는 세월을 살아 온 그들의 이야기는 이미 나의 이야기가 된 지 오래이며, 그렇기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귀 기울여 주고 싶은 것이다. 그들 서로의 사이에, 나와 그들 사이에 가슴 설레게 하는 낭만은 언제까지나 자리하고 있을 테니까.
원제: Before Midnight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이선 호크, 줄리 델피
북미 개봉: 2013년 5월 24일
한국 개봉: 2013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