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 (2011)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캡틴 아메리카, 또는 스티브 로저스라는 캐릭터를 떠올릴 때 느끼는 이미지는 강직함과 따뜻함, 이 두 가지다. 그는 굽히느니 부러지겠다는 각오로 불의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고, 포기라는 것을 모르며,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을 끝까지 싸우다 쓰러지는 것보다 굴욕적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약한 자와 동료에게 누구보다도 헌신하는 사람이다. 태어난 이후 꽤 오랫동안 강하다는 것, 남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고 자라왔기에 그는 약한 자의 어려움을 잘 안다. 친구와 동료를 뜨겁게 사랑하기에,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던 친우를 잃은 슬픔은 그를 두고두고 괴롭히기도 한다.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은 자칫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해 가까운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고, 스스로를 문제에 빠뜨릴 수도 있다. 때때로 그러한 문제들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다른 이들의 것까지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나중 일일 테고,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탄생을 그린 영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 이하 ‘퍼스트 어벤저’)에서 기대하거나 깊이 다룰 만한 주제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1940년대 2차대전 중에 탄생한 애국주의 수퍼히어로가 70년의 시차를 건너뛰어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퍼스트 어벤저>는 대단히 성공적인 탄생/부활기이다.

다른 훌륭한 수퍼히어로 영화와 마찬가지로, <퍼스트 어벤저>는 대번에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를 선보인다. 비록 몸은 허약하지만 마음 속 심지만은 굳건한 청년이라는 로저스의 각본상 캐릭터 설정과 묘사가 탄탄하고, 다소 경박한 이미지 탓에 캐스팅 당시 나의 기대감을 깎기도 했던 크리스 에반스는 로저스의 강직함과 따뜻함, 긍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정의관을 성실히 표현했다. 따라서 로저스가 완벽한 신체조건을 지닌 초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에반스가 캡틴 아메리카 수트를 입은 모습은 또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멋진가. 이제 크리스 에반스는 캡틴 아메리카이다.

주변 인물들의 묘사에도 공이 들어가 있다. 토미 리 존스의 체스터 필립스 대령, 헤일리 애트웰의 페기 카터, 스탠리 투치의 에이브러햄 어스카인, 도미닉 쿠퍼의 하워드 스타크는 특히 뛰어나다. 이들이 로저스와 맺는 관계와 화학작용은 다채롭고 생동감이 있다. 세바스찬 스탠의 버키 반즈와 덤 덤 두건을 비롯한 하울링 코만도, 리처드 아미티지의 히드라 암살자 하인츠 크루거, 토비 존스의 히드라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르님 졸라 등 웬만한 조역들까지도 골고루,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보는 이가 정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려졌다.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매끄럽고 경쾌하게 흐르는 수퍼히어로 영화의 왕도가 되고, ‘힘은 올바른 정신과 결합했을 때 의미를 지닌다’는 주제를 훌륭히 전달한다. 로저스와 카터의 은근한 로맨스도 기분 좋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수퍼 솔저가 된 로저스가 당초의 바람과는 달리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전쟁채권 및 모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캡틴의 원작 복장을 마음껏 희화화하기 때문에 만화의 오랜 팬들을 거슬리게 할 위험도 있는 대목이기도 한데, 굉장히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데다 오래된 수퍼히어로 캐릭터에 쌓인 먼지를 과감하게 털어내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과도기를 거치게 한다는 연출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에 오히려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원작 만화 초기의 프로파간다적 성격과 전쟁/수퍼히어로 영화 장르에 대한 가벼운 패러디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유감스러웠던 부분이 없지는 않다. 악역 레드 스컬 / 요한 슈미트가 그렇다. 때때로 아주 위협적인 모습을 노련하게 풀어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다. 레드 스컬은 캡틴 아메리카를 탄생시킨 것과 같은 혈청으로 초인적인 힘을 얻었지만, 악한 마음도 함께 증폭되었다는 설정의 캐릭터로서 이를테면 <스타 워즈>에서 포스의 어두운 면을 대표하는 다스 베이더와 닮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루크 스카이워커의 자리에 대입할 수 있는 캡틴 아메리카와 테제-안티테제 관계를 좀 더 탐구해 보았더라면 이야기도 더 풍부해졌을 것이고, 레드 스컬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감도 훨씬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레드 스컬은 으름장만 놓다 주인공에게 얻어터지는 단순한 구식 악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래 수퍼히어로 영화, 특히 마블 영화에서 악당이 주인공 영웅에 비해 약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두드러졌음을 떠올린다면 이것도 이제 하나의 전통이 된 것 같다. 그래도 휴고 위빙이 다소 어색한 독일식 액센트로 대사를 뱉어내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구식’이라서 마음에 든다. 2차대전, 나치, 히틀러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집착, 비밀조직, 스파이, 역사적으로 그 당시에 있을 수 없었던 오버 테크놀로지(여기서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웅의 통쾌한 활약, 복고 취향을 자극하는 세트와 같은 여러 가지 볼거리와 음악, …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레이더스) 같은 과거의 고풍스러운 영웅 이야기에서 이미 멋지게 써먹었던 요소들 아닌가. 또 <퍼스트 어벤저>의 감독 조 존스튼은 비슷한 요소를 듬뿍 집어넣은 또 다른 히어로 영화 <로케티어>를, 정확히 20년 전에 내놓지 않았던가.

더 나아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도 <로케티어>도 20세기 초반, 딱 <퍼스트 어벤저>의 극중 시대배경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연속활극(시리얼)에서 멋지게 써먹었던 것들에 또 빚을 지고 있고. 그렇게 보면 <퍼스트 어벤저>는 영롱히 빛나는 연속활극 역사의 일부분이기도, 동시에 그 연속활극에 대한 애정 어린 헌정이기도 하다. 게다가 <퍼스트 어벤저>의, 아까 언급했던 ‘홍보대사 시퀀스’에 캡틴이 출연한 연속활극 장면이 나오기도 했으니 – 당연히 흑백으로 – 이 얼마나 재미있는 양파껍질 벗기기 놀이인가! <퍼스트 어벤저>는 내가 그러한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그 영화들이 나에게 선사했던 즐거움과 흥분감을 고스란히 되살려 주었다. 비록 어떤 파격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이 영화의 왕도적이고 온건한 보수성에 호감을 갖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어벤저스>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워졌다.

원제: 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
감독: 조 존스튼
주연: 크리스 에반스, 헤일리 애트웰, 토미 리 존스, 휴고 위빙, 도미닉 쿠퍼
북미 개봉: 2011년 7월 22일
한국 개봉: 2011년 7월 28일

[수퍼 8] (2011)

(C) Paramount Pictures
(C) Paramount Pictures

가정해 본다. <수퍼 8>(Super 8)는 J. J. 에이브럼스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가 아닐까 하고. 1966년생인 에이브럼스는 영화의 시대배경인 1979년 우리나라 나이로 14살이었을 것이고, 이는 영화의 주인공 조 일행의 나이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에이브럼스를 비롯한 또래들은 유년기에 TV에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과 <심해 괴물>(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을 보며 공포와 매혹이 거칠게 뒤섞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동네 재개봉 극장에서 팝콘을 집어먹으며 <살아 있는 시체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을 보았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면 옹기종기 모여 만화책을 읽고, 손가락에 접착제와 에나멜을 잔뜩 묻혀가며 조립식 모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타 워즈>(Star Wars)와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를 보았을 때, 그 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경이로움과 흥분을 맛보며 스크린을 눈으로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집에 한 대씩은 있었을 수퍼 8mm 카메라를 들고 널따란 교외 지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흠뻑 섭취했던 문화 자양분을 바탕으로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그들의 꿈자락(당시엔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지언정)을 하나씩 하나씩 자아냈을 것이다. 길쭉하고 빨간 젤리를 서로 나눠 먹으면서.

흔히들 ‘떡밥의 제왕’이라 일컫는 에이브럼스지만, <수퍼 8>를 보면서는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별로 기대할 필요도 없고, ‘뭐가 있나~’하고 찾아볼 것까지도 없다. 이 감동적인 영화에서 고작 슬러쇼(왜 아니겠어?)니 뭐니 하는 걸 찾으려고 눈을 부라리고 있어야 하는가 말이다(사실 그보다 훨씬 많은 이런저런 것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들이다). 에이브럼스의 전작인 <미션 임파서블 III>와 <스타 트렉>과 같이 놓고 보았을 때, <수퍼 8>에서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눈에 띈다. 어느 쪽이나 예전에 에이브럼스를 매료시켰을 미국의 대중문화 컨텐츠를 업데이트한 작품들이지만(이는 그의 TV 시리즈들도 마찬가지다), <수퍼 8>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한 고백적 성격이 더 강하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E. T.>가 한때 그랬듯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수퍼 8>는 <미지와의 조우>와 <E. T.>, 조금 더 나아가 <구니스>를 보면서 자란 세대들이라면 저절로 미소를 지을 만한 영화이다. 70년대라는 향수 어린 시대배경, 결손가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소년/소녀들이 환상적인 모험을 통해 서로, 또는 어떤 미지의 존재와 교감을 이루고 마침내 갈등을 해소하여 성장을 시작한다는 내용, 미국 대중문화의 풍부한 인용,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연출, 감각적인 시각효과 같은 것들 말이다. 말하자면 에이브럼스가 그 나이에 겪었을 법한 일상에 역시 그가 꿈꾸었을 법한 비일상적인 사건이 수퍼 8mm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통해 결합한 이야기이자, 스필버그 영화를 사랑했던 세대에게 바치는 종합 선물 세트가 바로 <수퍼 8>인 것이다.

아아, 그래서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살던 동네의 익숙한 골목길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야기가 흐르는 내내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잠시라도 지울 수가 없었다. 때로는 너무나도 즐거워서, 그럴 때마다 극장에서 주위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행동, 즉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기도 했다. 시작하면서 파라마운트 로고에 이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앰블린 엔터테인먼트 로고, 군데군데 존 윌리엄스나 제리 골드스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마이클 지아키노의 음악, 역광을 활용하여 독특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스필버그의 전매특허격 연출을 변용한 화면, 그리고 비록 영화 속에서만 만날 수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아이들. 그 아이들이 무비 카메라를 들고 좀비 영화를 찍으며 주고받는 이야기들, 그 속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작지만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꿈. <수퍼 8>에는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바로 그 추억과 열정, 꿈이라는 요소에 이끌렸다. 에이브럼스가 이 영화를 만든 건 떡밥 따위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나누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스크린 속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그 아이들을 보며 나는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어쩌면 아직 피어나지 못한 채로, 그 시절 그대로인 채로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영화 속 대사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와 공명하며 마음 속에 약하지만 분명한 울림을 남겼다.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아직도 가슴 속을 울리고 있는 그 무언가의 모습을 찾으러 나만의 작지만 담대한 모험을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한다.

원제: Super 8
감독: J. J. 에이브럼스
주연: 조얼 커트니, 엘 패닝, 카일 챈들러, 라일리 그리피스, 라이언 리
북미 개봉: 2011년 6월 10일
한국 개봉: 2011년 6월 16일

[X-멘: 퍼스트 클래스] (2011)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X-멘>과 그 속편 <X2>가 그토록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는 인간의 편견과 그것으로부터 가지를 친 차별과 소외,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틀에 요령 있게 녹여냄으로써, 대중영화/장르영화의 참신한 전범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싱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고통 받아야 했던 뮤턴트들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락은 물론 주제 의식도 탄탄하게 갖춘 수퍼히어로 영화를 빚어냈다. 내가 보기에 이들 두 편의 영화, 특히 제1편 <X-멘>은 수퍼히어로 영화 붐의 결정적인 촉발점이 된 <스파이더맨> 이전에 이미 21세기 수퍼히어로 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분명한 주제 의식, 현실의 물리법칙을 최대한 준수하면서도 수퍼히어로의 신화적 매력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은 세밀하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은 <X-멘>의 뒤를 이었던 수많은 수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불과 몇 편만이 제대로 이뤄냈을 뿐이다.

싱어는 이 프리퀄 <X-멘: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작자로 물러났고, 이번에는 <킥애스>로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뽐냈던 매튜 본이 감독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싱어가 <X-멘>과 <X2>에서 유지했던 핵심은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그 빛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로 시대 배경을 다소 느슨하게 제시했던 전편과는 달리 약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그린 <퍼스트 클래스>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 60년대 인권운동이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현대사와 X-멘의 결성이라는 수퍼히어로 세계의 신화를 과감히 연결한다. 이야기의 시공간은 더욱 구체적으로 설정되고, 전편에서 불거졌던 갈등의 원인과 숨겨졌던 이야기들이 밝혀지면서 X-멘의 영화 세계는 한층 더 복잡해지고 생동감을 띤다. <퍼스트 클래스>는 단순히 X-멘 영화 시리즈 여기저기에 뚫린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임무를 아주 훌륭히 수행하는 것은 물론, X-멘 영화 세계를 의미 있게 확장한다.

<퍼스트 클래스>의 연출이 완전무결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편보다 등장인물이 두세 배는 늘어났고 그 대부분은 뮤턴트다. 아마도 그들의 초능력을 하나씩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상영시간의 절반은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X-멘 결성이라는 중요한 플롯 포인트를 엮어야 하고, 제목이 뜻하는 바에 맞춰 뮤턴트들이 훈련할 시간도 필요하다. 프리퀄이니만큼 X교수, 매그니토, 미스틱 등 주요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발굴, 발전시키되 전편과 무리 없이 연결시켜야 하고, 조단역급 뮤턴트들도 다루어야 한다. 원작 및 전편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인용과 서비스도 군데군데 뿌려 두어야 한다(그 중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것들도 몇 가지 있다). 여름 블록버스터 전쟁 참전작이니 액션과 시각효과도 잘 짜 넣어야 한다. 장면이 매우 빠르게 바뀌어 가고, 그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와 새로운 초능력을 선보이거나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는 등 계속해서 못 보던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정보량이 아무튼 굉장히 많다. 집중해서 보아야 하고, 가능하면 두어 번 다시 보기를 권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구성상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퍼스트 클래스>는 기적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100%는 아니지만, 98% 이상이라고 할까. 단 한 장면도 낭비되지 않았고, 묘사는 간결하며 군살이 없다. 어쩌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 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거슬릴 만큼은 아니다. 보고 나면 이야기와 주제가 깔끔히 정리된다. 무엇보다도 <X-멘>과 <X2>의 유전자를 한 톨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계승하고 있어 그 매력과 향기를 한껏 느낄 수 있으니 기쁘다. 배우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등장인물을 살아 숨쉬도록 연기했지만, 특히 제임스 매커보이와 마이클 파스벤더는 뛰어나다. 케빈 베이컨도 제법 위협적인 악역을 잘 소화했다. 그야말로 발군의 만듦새. 전편의 완성도에 버금가는 것은 물론, <아이언 맨>이나 <스파이더맨> 1, 2편을 잇는 ‘최고의 마블 수퍼히어로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X-멘: 최후의 전쟁>과 <X-멘 탄생: 울버린>에 실망했던 팬이라면, <퍼스트 클래스>는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작품이다. 사실 이것은 보통 단비가 아니다. <퍼스트 클래스>는 멋진 X-멘 영화에 목말라 있었던 팬들을 촉촉하고 따뜻하게 적셔 주고, 그들의 가슴을 힘차게 뛰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바라 왔던 바로 그 X-멘 영화, 아니, 분명히 그 이상이다.

원제: X-Men: First Class
감독: 매튜 본
주연: 제임스 매커보이, 마이클 파스벤더, 제니퍼 로렌스, 케빈 베이컨, 니콜라스 홀트
북미 개봉: 2011년 6월 3일
한국 개봉: 2011년 6월 2일

[가디언의 전설] (2010)

(C) Warner Bros. Pictures
(C) Warner Bros. Pictures

‘영상은 좋지만, 이야기가 약하다.’ 광고나 뮤직 비디오 업계에서 영화로 건너온 감독들의 작품을 평할 때 관용구처럼 쓰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짧은 시간 안에 이미지와 그 속의 메시지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이들 매체와 좀 더 긴 호흡으로 이끌어야 하는 영화 사이의 큰 차이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어 왔지만, 때로는 이 분야 출신 감독들이 ‘이야기를 다룰 줄 모른다’는 편견이 개입되어 종종 남용되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편견에 값하는 영화들도 있기는 했다.

<가디언의 전설>(Legend of the Guardians: The Owls of Ga’Hoole)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 감독도 광고를 통해 유명세를 얻으며 영화계로 넘어왔다. 그렇지만 스나이더는 영상과 이야기를 독특한 감각으로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아왔다. 데뷔작인 <새벽의 저주>부터 바로 전 작품인 <워치멘>까지, 스나이더는 폭발하고 질주하는 듯한 이미지를 살린 인상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관람 전까지 그 높은 기대치만큼이나 나를 불안하게 했던 <워치멘>만 해도, 스나이더는 복잡한 플롯과 강렬한 정치적, 시대적 메시지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그래픽 노블보다 더 그래픽 노블다운 영화, 이미지가 내러티브이고 내러티브가 이미지인 영화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3D 애니메이션 <가디언의 전설>도 영상의 질 만큼은 독보적인 수준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영화의 화면은 3D 영화의 새로운 경지에 ‘거의’ 근접했다. 올빼미들은 문자 그대로 얼이 빠질 만큼 사실적이다. 공들여 작업한 흔적이 너무나도 확연히 드러나는 올빼미들의 컴퓨터 그래픽은 정교한 3D 효과와 결합하여 경이로운 실재감을 창출해 낸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저렇게 인간과 똑같은 수준의 지능과 감정을 가졌고, 갑옷과 무기를 만들 줄 알며, 마법과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시간을 사는 특별한 올빼미들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덧붙여 3D 입체영상이라는 마술은 관객이 올빼미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여기에 아이맥스 대형 화면이 곁들여진다면 그 효과는 다섯 배쯤 더 난다). 3D 비행 장면 연출에 한 획을 그었던 <드래곤 길들이기>의 박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유감스럽게도 <가디언의 전설>에서 스나이더의 연출은 나사가 빠져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그럭저럭 유지되지만, 군데군데 필요하다 싶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때로는 마땅히 A에서 B를 거쳐 C로 넘어가야 할 대목을 A에서 C로 어물쩍 뛰어넘어 버린다. 어떤 장면들은 연결이 퍽 어색하고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이야기는 압도적인 박력을 선보인 영상과 제대로 융합하지 못한 채 계속 겉돈다. 그렇다고 흥미롭거나 좀 튀는 캐릭터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렇고 그런 족속뿐이다. 그런 캐릭터들이 이미 앞일이 빤히 내다 보이는 정해진 길을 따라 가면 모든 일이 너무나 쉽게 해결되어 버리니, 마음 속에 남는 여운이 옅을 수밖에 없다.

각색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세 권 분량의 원작을 한 시간 반이 조금 넘는 영화로 줄이자니 가지치기가 상당히 많았으리라.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살이 다 발려지고 뼈만 남은 꼴이 되었다.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임을 감안하더라도, <가디언의 전설>은 얼개만 간신히 남은 영웅신화이다. 그리고 ‘영상은 좋지만, 이야기가 약하다’는 평을 들을 만한 영화이다. 본편 상영 전에 선보였던 ‘로드 러너’ 단편이 똑같이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원제: Legend of the Guardians: The Owls of Ga’Hoole
감독: 잭 스나이더
주연: 짐 스터지스, 휴고 위빙, 에밀리 바클레이, 애비 코니쉬, 라이언 콴튼
북미 개봉: 2010년 9월 24일
한국 개봉: 2010년 10월 28일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2003)

(C) 「あずみ」制作委員会
(C) 「あずみ」制作委員会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

25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あずみ / 키타무라 류헤이 감독, 이하 <아즈미>)은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란으로 신음하고 있는 전국시대의 일본.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더 이상의 비극을 막고자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미리 처단하기 위한 정예 살수 집단을 비밀리에 양성한다. 그 구성원은 전란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 아즈미를 비롯한 10명의 고아들. 혹독한 훈련의 마지막 날, 둘씩 짝을 지어 서로를 베어야 하는 처절한 관문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5명은 오직 정적의 처단만을 위한 기나긴 여정에 나서게 된다.

<아즈미>는 기본적으로 전국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을 취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어떤 일본 시대극보다도 판타지 성격이 강하다. CG와 특수촬영이 잔뜩 사용된 화면과 시대가 뒤섞인 듯한 기괴한 스타일의 의상, 너무나 현대적인 대사를 읊는 아이돌 스타의 대거 기용 등 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고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이며, 가장 일본적인 소재를 사용했으면서도 전혀 일본적이지 않은 영화의 성격을 반영한다. ‘<아즈미>는 일본의 <킬 빌>’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사용될 만큼, 이 영화는 세계 어느 곳의 관객과 만나도 무난한 반응을 이끌어 내도록 계산적으로 만들어졌다. 더욱이, 소위 ‘컬트’ 코드로 영화판에 뛰어든 키타무라 류헤이 감독은 가뜩이나 과장된 설정의 이 판타지 시대극을 마치 <매트릭스>나 <이퀼리브리엄> 같은 감각으로 찍어 내어, 영화를 보고 나면 온몸에 과다 분비되고 남은 아드레날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아즈미와 200명이 넘는 무사들이 맞붙는 클라이맥스의 대결전에서 수직으로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워크, 한 장면에서 액션의 속도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등의 연출은 보통 일본식 칼부림 영화와는 확실히 차별된 이미지를 구현한다.

코야마 유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아즈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보다는 안전한 원작을 택한다’는 현재 일본 상업/장르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 준다. 창의적이고 신선하지만 상업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는 소재보다는 이미 인기가 검증된 만화나 소설, TV 드라마를 실사화/장편화함으로써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이러한 제작 풍토는 사실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시에 일본 만큼 다양한 장르의 컨텐츠가 다른 형태의 미디어로 확대/재생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라도 드물다. 작년에는 인기 드라마의 극장판 <춤추는 대수사선 2: 레인보우 브리지를 봉쇄하라!>나 <키사라즈 캐츠아이: 일본 시리즈> 등이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올해에도 <캐산>, <큐티 하니>, <우미자루>, <데빌맨>, <시모츠마 이야기>, <철인 28호> 등 매스컴과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의 각색물이며, 현재도 많은 만화와 소설, 애니메이션, 드라마가 실사화를 기다리고 있거나 그 과정에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안전 위주의 제작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장기 불황에 허덕이는 정체된 일본 사회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사회의 활력 저하는 새로움과 모험의 추구 보다는 안주와 향수를 자극하게 되고, 이러한 영향이 크리에이터로 하여금 복고적이고 친숙한 작품을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70년대에 주도적인 영상매체로서의 자리를 TV에게 완전히 빼앗겼고, 80년대 이후에는 헐리우드 외화의 초강세와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작가군의 부진으로 몸살을 앓아온 일본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도 한몫을 했다. 물론 키타노 타케시와 같이 해외 평단에서 호평을 받거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감독과 작품들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정작 자국인 일본에서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실사화’의 열풍은 다양한 장르 속에 엄청난 양의 컨텐츠를 채워 넣은 일본의 대중문화라는 창고에 신제품을 만들어 쌓아놓기 보다는 현재 보유한 재고를 계속 꺼내 쓰고 있는 상황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창의적 부진에 빠진 일본 장르영화의 미래는 과연 어둠 뿐일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정적으로 어두운 전망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도권과 인디펜던트가 명확히 구분된 일본 영화계의 이중적인 구조가 뛰어난 장르영화를 생산할 수 있는 기초 토양을 구축하고 있다. 일본에는 어느 장르든 제도권 이외의 시장과 팬층이 든든히 존재하는데, 당연히 이들을 위한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많은 영화인들과 집단도 있다. 이러한 인디펜던트의 인력들이 제도권에 편입되어 상업영화계의 젖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링>의 헐리우드 리메이크 이후, 현재 일본영화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장르인 공포영화야말로 이러한 ‘비주류의 저력’을 멋지게 증명하고 있는 경우이겠다. 최근 <주온>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헐리우드 진출까지 이루어 낸 시미즈 타카시 감독도 원래는 <주온>을 극장용이 아닌 비디오용 소프트로 출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항상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미이케 타카시, 이미 거장이 된 쿠로사와 키요시 등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공포영화 감독들도 독립영화계에서 경험과 내공을 쌓은 뒤 제도권으로 진출한 인물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르영화를 무기로 나타난 <아즈미>의 키타무라 감독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상업영화의 최고봉이 되어 헐리우드로 건너가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밝혔을 정도로 관객에게 철저히 서비스한다는 작품관을 갖고 있다. 장르영화의 핵심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키타무라 감독의 시각은 팔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철저한 경쟁의 세계에서 직접 몸을 부대끼고 터득한 지혜인 것이다. 초창기의 날카로움이 어느 정도 무뎌지기는 했지만, <아즈미>에서도 그의 재기 넘치는 연출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는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재로부터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뽑아낸다(핏빛 장미를 물고 우아하게 일본도를 휘두르는 백의의 비죠마루!). 키타무라 감독의 독특한 영상 감각과 메이저 영화사의 자본이 행복하게 만난 결과로, 제도권 바깥과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영화계의 이중구조가 가져다 준 혜택이기도 하다.

일본의 장르영화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만은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과 변수가 존재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를 소비하는 다양한 취향의 관객층과 이들을 만족시키는 데 충분할 만큼 축적된 컨텐츠, 그리고 그 확대/재생산을 진두지휘하는 감독들의 존재가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즈미>는 그러한 일본 장르영화의 특성이 하나의 작품에 모두 응축된 예이다.

키타무라 류헤이 (北村龍平)

1969년 오사카에서 출생. 17세 때 호주로 건너가 시드니 영상예술학교 영화과에 입학. 졸업 작품인 단편 <엑시트>가 연간 최우수 감독상과 코닥 어워드를 수상. 일본으로 돌아간 뒤 영화집단 네이팜 필름을 설립. 단 30만 엔의 제작비로 10일만에 완성한 액션 호러영화 <다운 투 헬>로 제1회 인디즈 무비 페스티벌 그랑프리를 수상. 이후 느와르 <히트 애프터 다크>를 거쳐 장편영화 데뷔작 <버서스>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음.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은 그의 최대 흥행작이며,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괴수영화 고지라 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 <고지라: 파이널 워즈>를 작업하고 있음. 이외에도 <지옥갑자원>(야마구치 유다이 감독)을 제작하였으며, TV 드라마 <스카이 하이>, 인기 비디오 게임 <메탈 기어 솔리드: 트윈 스네이크>의 데모 영상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 중.

작품목록
<다운 투 헬> (1997)
<히트 애프터 다크> (1999)
<버서스> (2000)
<얼라이브> (2002)
<잼 필름즈> (2002 / <메신저> 에피소드 연출)
<아라가미> (2002)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2003)
<스카이 하이: 극장판> (2003)
<고지라: 파이널 워즈> (2004년 12월 공개 예정 / 현재 촬영중)

– 브레이크뉴스에 실은 글. 게재된 날은 2004년 6월 26일이다.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다.

[스타 워즈: 클론 전쟁] (2008)

(C) Lucasfilm
(C) Lucasfilm

<스타 워즈: 클론 전쟁>(Star Wars: The Clone Wars)은 <스타 워즈 에피소드 III: 시스의 복수> 이후 3년 만에 극장에 걸리는 관련 작품인 동시에, 오는 10월부터 미국 카툰 네트워크와 TNT 채널에서 방영될 동명 애니메이션 TV 시리즈의 파일럿에 해당한다. <클론 전쟁>은 소설, 만화, 게임, 완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개되어 온 <스타 워즈>의 확장 세계(Expanded Universe)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조지 루카스가 직접 구상한 내용을 다루는 데다 이 내용이 정전(canon)인 영화 6부작의 시간대에 포함되어 있어, 다른 확장 세계 작품보다 훨씬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클론 전쟁은 <스타 워즈 에피소드 II: 클론의 공격> 말미에 시작되어 <에피소드 III>까지 이어지는 3년 동안의 전쟁을 일컫는다. 이번 극장판과 TV 시리즈는 이 기간 동안의 사건을 그리게 되는데, 분량 상 상당한 시간을 건너뛰거나 특정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전제조건에서 해방되어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에피소드를 그릴 수 있고, 더 많은 등장인물을 선보인다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극장판 <클론 전쟁>에서는 TV 시리즈로 이어지는 중요한 새 인물로 아소카 타노가 첫선을 보인다. 애너킨 스카이워커의 파다완이 되는 그는 본편에서 가장 비중 있게 묘사된다. 완벽한 이론을 숙지하고 있지만 특유의 앞뒤 안 가리는 성격 탓에 실수 연발이고 스승인 애너킨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그는 갖은 모험을 겪으며 파다완으로서 실전에 대응하는 능력과 스승에 대한 충성심에 관해 어렴풋이나마 교훈을 얻는다. 애너킨도 제자를 둔 오비원 케노비의 입장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기회를 갖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 극장판은 아소카를 소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솔로와 그 주변 인물들, 또는 <에피소드 II>의 애너킨과 오비원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아소카와 애너킨의 티격태격은 <클론 전쟁>에서 가장 볼 만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애니메이션 스타일에서 눈에 띄는 점은 2003년판 <클론 전쟁>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기반으로 하되, 새로운 접근법을 취한 캐릭터 디자인과 실사를 방불케 하는 연출이다. 캐릭터 디자인은 실사와 인형의 기묘한 경계에 있어 이채로운데, 제작진도 인정을 했듯이 CG이면서도 인형극 <선더버드>에 나오는 인형처럼 딱딱한 고체에 채색을 한 듯한 질감을 살린 점이 특히 재미있다(심지어는 붓자국 같은 흔적도 보인다). 비판적인 평을 받기도 했던 캐릭터의 뻑뻑하고 각진 움직임도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새롭지 않을까. 대규모 전투 시퀀스의 카메라워크나 실사영화와 거의 동일한 편집 방식도 극장용 작품에 걸맞은 박진감을 이끌어낸다. 아울러 메카닉 묘사는 프리퀄 영화 3부작에서 이미 대다수가 CG로 구현된 바 있어 이번 극장판에서는 위화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클론 전쟁>의 단점 역시 연출에 있다. 장면 하나하나는 나쁘지 않지만, 그것들을 한 편의 영화로 연결할 때 무리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띈다. 당초 TV판으로만 기획했던 작품임을 감안하면 진위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극장판은 TV 시리즈 제1화를 비롯한 2~3화 분량을 장편 길이로 엮은 결과물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조각난 시퀀스들을 약간 뒤섞인 시간 순서에 따라 느슨하게 연결한 듯한 모습이다. 페이스가 갑자기 빨라졌다 느려지고, 시간을 채우기 위해 잘라냈어야 할 끄트머리를 그대로 둔 티가 역력하다. <스타 워즈>에 어느 정도 익숙한 관객이라면 쉽게 적응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야기 한복판에서 갑자기 시작하여 쉴 새 없이 내달리는 전개와 계속 추가되는 새로운 정보에 부담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10대 이하의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객층을 발굴하려는 의도도 당연히 있겠지만, 결국 <클론 전쟁>도 기존 <스타 워즈> 팬의 애정과 충성도에 호소하는 작품이다. 다른 영화 같으면 치명적인 단점이 될 만한 부분도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는 건 내가 올해로 20년 된 (덧붙여 설정에 별로 신경 안 쓰는) <스타 워즈> 팬이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을 당혹스럽게 했던 ‘오프닝 크롤’의 삭제도 전쟁 드라마라는 <클론 전쟁>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스타쉽 트루퍼스>의 모병 광고(과장된 자막이 없을 뿐)나 전쟁 관련 보도를 연상케 하는 도입부를 넣으려는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클론 전쟁>에 대한 악평은 <스타 워즈> 시리즈의 전통과 파격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는 과도기적 작품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 뿐이라는 대단히 ‘주관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더욱이 <클론 전쟁>은 이 극장판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TV 시리즈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 새로운 은하 서사시를 나는 매우 흥미롭게(with great interest) 지켜볼 것이다.

원제: Star Wars: The Clone Wars
감독: 데이브 필로니
주연: 매트 랜터, 제임스 아놀드 테일러, 애쉴리 엑스타인, 톰 케인, 크리스토퍼 리, 새뮤얼 L. 잭슨
북미 개봉: 2008년 8월 15일
한국 개봉: 2008년 9월 4일

[다크 나이트] (2008)

(C) Warner Bros. Pictures
(C) Warner Bros. Pictures

전편 <배트맨 비긴즈>의 마지막 장면. 브루스 웨인은 오랜 방황과 고난 끝에 가섬 시를 위기에 몰아넣었던 악당 라즈 알 굴을 물리치고, 도시의 수호자 ‘배트맨’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새로운 악당 조커의 등장이 암시되고, 배트맨이 그를 찾아나서면서 영화는 끝난다. 약속 대로 속편인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에서 우리는 배트맨과 조커를 만난다. 조커는 얼마나 지독한 광기를 보여줄 것인가. 배트맨과의 한판승부는 얼마나 박진감이 넘칠 것인가. 그의 장비는 얼마나 멋지게 업그레이드될 것인가. 전편에서 소개된 등장인물의 운명, 특히 브루스와 레이첼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3년 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예상해 왔다.

<다크 나이트>는 좋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예상을 빗나간다. 전편에 이어 메가폰을 잡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번에도 수퍼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는 과정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존재 의미를 되물으며 내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것은 전편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덕이었기에 속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놀라운 속편은 전편의 미덕을 이어받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더욱 깊이 파고들고, 더욱 넓게 펼쳐 보인다. <다크 나이트>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다.

배트맨의 등장으로 가섬 시는 변화를 겪게 된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도시의 모든 이가 엄청난 자극을 받은 것이다. 썩을 대로 썩었던 법 집행조직에서는 정의와 청렴을 지키려는 자들이 나타난다. 범죄조직은 큰 타격을 입고 위축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악랄해지고, 시민들은 자경 활동에 나선다. 도시는 얼핏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전보다도 더 위태로워진다. 배트맨은 가중되는 도시의 혼란과 음지를 전전해야 하는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킬 후계자로 검사인 하비 덴트를 점찍는다. 여기에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 조커가 끼어든다. 조커는 극심한 변화의 난맥상 한가운데에 서서 치밀한 계획으로 혼란을 증폭시킨다. 배트맨의 이상은 점차 멀어져만 가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다크 나이트>는 가섬 시라는 가상의 사회 속에서 배트맨 / 브루스 웨인과 조커 그리고 하비 덴트라는 세 사람의 운명을 냉정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전편에서는 배트맨이 정의 구현을 위한 대쪽 같은 이상주의를 상징했다면 이번에는 그 역할을 덴트가 물려받는다. 분명한 목적에 따라 파괴를 자행했던 라즈 알 굴과는 달리, 조커는 철저히 악을 위한 악, 혼돈을 위한 혼돈 그 자체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할 거창한 대의가 없다. 단지 순수한 살인과 폭력, 파괴를 즐길 따름이다. 덴트와 조커의 각기 명확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배트맨의 위치는 애매하다. 덴트에게 배트맨은 유치장에 처넣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지지할 수만도 없는 존재이다. 조커에게 배트맨은 체스판의 말에 불과하다. 전편에서 배트맨이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겉모습 뿐이었음을, 관객은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배트맨은 가섬 시를, 가섬 시는 배트맨을 서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배트맨이 가섬 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한때 이상을 좇았던 그는 같은 이상을 공유했던 덴트의 파멸을 보면서 ‘딱딱하면 부러진다’는 말을 상기했을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을 통해 <배트맨 비긴즈>에서 그 단초가 제시되었던 수퍼히어로 영화의 리얼리즘은 <다크 나이트>에서 하나의 완성에 다다른다.

모든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를 선사하지만,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히스 레저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인 갱스터 잭 니콜슨의 조커는 이제 없다. 레저(고인이 된 그에게 다시 한 번 명복을)는 단순한 악당을 넘어 광기 그 자체가 된다. 그의 연기는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별똥별과 같다. 그럼에도 그 빛은 우리의 망막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겨놓았다.

<다크 나이트>는 보는 이를 말 그대로 압도하는 영화이다. 원작 만화의 팬들은 그래픽 노블보다 더욱 그래픽 노블다운 작품의 구성과 표현 방식,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실사화되었다는 사실에 압도당할 것이고, 장르영화 팬들은 주제와 형식이 거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 그 이전까지의 수퍼히어로 영화가 도달하지 못했던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에 압도당할 것이다. 배우의 팬들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그들의 넘치는 활력에 압도당할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이 영화에 압도당할 것이다. 첫 프레임부터 마지막 프레임까지, <다크 나이트>는 진중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이 영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힘의 손아귀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원제: The Dark Knight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주연: 크리스천 베일, 마이클 케인, 히스 레저, 애런 에커트, 매기 질렌할
북미 개봉: 2008년 7월 18일
한국 개봉: 2008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