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 거대 괴수들이 지구에 재난을 초래하자, 세계 각국이 건조한 거대 로봇이 괴수들에 맞선다는 영화 <퍼시픽 림>(Pacific Rim)의 시놉시스는 발표되자마자 흥미 정도가 아니라 군침을 줄줄 흘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렸을 때 나의 눈과 귀를 붙들어 놓고 도무지 놓아 줄 생각을 않던 여러 가지 로봇 만화영화(이럴 땐 ‘애니메이션’보다는 ‘만화영화’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를 실사영화로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어 좀이 쑤실 텐데, 역시 그 시절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은 소중한 취미가 된 특촬-괴수영화의 요소까지 곁들여진다니 이거야말로 나를 위한 신나는 선물 세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 그야말로 완벽한 3종 세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과연, <퍼시픽 림>은 기대를 전혀 배반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설마 여기까지, 이렇게까지 해 버렸을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이것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기와 격렬한 흥분으로 가득한 청룡열차 질주다. 엄청나게 크고, 기가 질릴 정도로 때려부수며, 혼이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청을 울린다. 지금까지 어느 헐리우드 영화의 액션도 <퍼시픽 림>이 도달한 곳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영화도! 게다가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델 토로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이 영화를 위해 그가 창조한 세계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점이다. 그 독특하고 기괴한 아름다움은 <퍼시픽 림>에 파괴를 주종목으로 삼은 다른 블록버스터들과는 다른 확고한 존재감과 독창성을 부여하고, 자칫 작품이 규모에 함몰될 수 있는 부작용을 막아낸다. 자신만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스펙터클을 선사할 줄 아는 델 토로식 블록버스터 가운데 <퍼시픽 림>은 대중친화적인 면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이쪽 장르를 사랑해 온 골수 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근래 여름 영화가 지나치게 어둡고 복잡한 구조로 점철된 탓에 피로감을 느껴 왔다면 <퍼시픽 림>의 직선적이고 장쾌한 정면 돌파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하튼 머리를 싸매는 대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신나게 볼 수 있다. 설정 상 속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에도, 떡밥 깔기보다는 이야기를 완결하는 데 오롯이 집중했기 때문에 속편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낚였다는 낭패감도 없다. 끝나고 나면 상쾌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퍼시픽 림>은 나를 다시 한 번 일곱 살 어린아이로 만들어 브라운관 TV로 만화영화를 보던,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에 불을 켜고 해적판 괴수대백과를 탐독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넘어, 아예 그 환상의 세계 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가게 했다. 입체감과 공간감이 뛰어난 3D 화면과 아이맥스의 초대형 스크린은 그러한 ‘드리프트’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다. 극중 거대 로봇인 ‘예거’를 조종하려면 두 파일럿의 기억을 공유시키는 과정이 필요한데, 기예르모 델 토로는 화면 속 파일럿들이 모르는 또 하나의 드리프트, 즉 화면 밖에 있는 나의 기억도 함께 ‘싱크로’해야 한다는 비밀 절차를 몰래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내가 기꺼이 뉴럴 브리지에 마음을 맡긴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경이로움을 다시 한 번 맛보게 해 준, 가슴 벅찬 순간의 연속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럼에도 이제 중년이 된 나는 ‘내가 드리프트 중이구나’ 라는 사실을 이따금씩 깨닫는 순간이 있다. 아무래도 플롯이나 등장인물의 묘사에서 전형성과 얄팍함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뒤에 이어질 전개를 비교적 쉽게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등장인물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대부분 맞아 떨어진다. 특히 이쪽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몇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더 그럴 만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러한 단점쯤은 너그러이 봐 주고 싶다. 걸고 넘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따름이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쩌면 <퍼시픽 림>은 과거 로봇 애니메이션이나 괴수영화의 전형성마저 되살리고 싶어한 결과가 아닐까.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그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예거의 필살기나 괴수 디자인까지도 익숙한 데가 적지 않다. 그 위에 자신만의 장난기와 로봇과 괴수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진 델 토로 터치가 어색하지 않게 덧씌워지니, 친숙하면서도 참신한 또 하나의 가상 세계가 탄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퍼시픽 림>은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실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영화가 된다.
별점: ***1/2 (넷 만점)
원제: Pacific Rim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주연: 찰리 허넘, 키쿠치 린코, 이드리스 엘바, 찰리 데이, 론 펄먼
개봉일: 2013년 7월 11일 (한국) / 7월 12일 (북미)
공식 웹사이트: pacificrimmovi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