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2003)

(C) 「あずみ」制作委員会
(C) 「あずみ」制作委員会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

25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あずみ / 키타무라 류헤이 감독, 이하 <아즈미>)은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란으로 신음하고 있는 전국시대의 일본.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더 이상의 비극을 막고자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미리 처단하기 위한 정예 살수 집단을 비밀리에 양성한다. 그 구성원은 전란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 아즈미를 비롯한 10명의 고아들. 혹독한 훈련의 마지막 날, 둘씩 짝을 지어 서로를 베어야 하는 처절한 관문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5명은 오직 정적의 처단만을 위한 기나긴 여정에 나서게 된다.

<아즈미>는 기본적으로 전국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을 취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어떤 일본 시대극보다도 판타지 성격이 강하다. CG와 특수촬영이 잔뜩 사용된 화면과 시대가 뒤섞인 듯한 기괴한 스타일의 의상, 너무나 현대적인 대사를 읊는 아이돌 스타의 대거 기용 등 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고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이며, 가장 일본적인 소재를 사용했으면서도 전혀 일본적이지 않은 영화의 성격을 반영한다. ‘<아즈미>는 일본의 <킬 빌>’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사용될 만큼, 이 영화는 세계 어느 곳의 관객과 만나도 무난한 반응을 이끌어 내도록 계산적으로 만들어졌다. 더욱이, 소위 ‘컬트’ 코드로 영화판에 뛰어든 키타무라 류헤이 감독은 가뜩이나 과장된 설정의 이 판타지 시대극을 마치 <매트릭스>나 <이퀼리브리엄> 같은 감각으로 찍어 내어, 영화를 보고 나면 온몸에 과다 분비되고 남은 아드레날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아즈미와 200명이 넘는 무사들이 맞붙는 클라이맥스의 대결전에서 수직으로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워크, 한 장면에서 액션의 속도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등의 연출은 보통 일본식 칼부림 영화와는 확실히 차별된 이미지를 구현한다.

코야마 유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아즈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보다는 안전한 원작을 택한다’는 현재 일본 상업/장르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 준다. 창의적이고 신선하지만 상업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는 소재보다는 이미 인기가 검증된 만화나 소설, TV 드라마를 실사화/장편화함으로써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이러한 제작 풍토는 사실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시에 일본 만큼 다양한 장르의 컨텐츠가 다른 형태의 미디어로 확대/재생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라도 드물다. 작년에는 인기 드라마의 극장판 <춤추는 대수사선 2: 레인보우 브리지를 봉쇄하라!>나 <키사라즈 캐츠아이: 일본 시리즈> 등이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올해에도 <캐산>, <큐티 하니>, <우미자루>, <데빌맨>, <시모츠마 이야기>, <철인 28호> 등 매스컴과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의 각색물이며, 현재도 많은 만화와 소설, 애니메이션, 드라마가 실사화를 기다리고 있거나 그 과정에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안전 위주의 제작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장기 불황에 허덕이는 정체된 일본 사회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사회의 활력 저하는 새로움과 모험의 추구 보다는 안주와 향수를 자극하게 되고, 이러한 영향이 크리에이터로 하여금 복고적이고 친숙한 작품을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70년대에 주도적인 영상매체로서의 자리를 TV에게 완전히 빼앗겼고, 80년대 이후에는 헐리우드 외화의 초강세와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작가군의 부진으로 몸살을 앓아온 일본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도 한몫을 했다. 물론 키타노 타케시와 같이 해외 평단에서 호평을 받거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감독과 작품들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정작 자국인 일본에서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실사화’의 열풍은 다양한 장르 속에 엄청난 양의 컨텐츠를 채워 넣은 일본의 대중문화라는 창고에 신제품을 만들어 쌓아놓기 보다는 현재 보유한 재고를 계속 꺼내 쓰고 있는 상황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창의적 부진에 빠진 일본 장르영화의 미래는 과연 어둠 뿐일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정적으로 어두운 전망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도권과 인디펜던트가 명확히 구분된 일본 영화계의 이중적인 구조가 뛰어난 장르영화를 생산할 수 있는 기초 토양을 구축하고 있다. 일본에는 어느 장르든 제도권 이외의 시장과 팬층이 든든히 존재하는데, 당연히 이들을 위한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많은 영화인들과 집단도 있다. 이러한 인디펜던트의 인력들이 제도권에 편입되어 상업영화계의 젖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링>의 헐리우드 리메이크 이후, 현재 일본영화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장르인 공포영화야말로 이러한 ‘비주류의 저력’을 멋지게 증명하고 있는 경우이겠다. 최근 <주온>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헐리우드 진출까지 이루어 낸 시미즈 타카시 감독도 원래는 <주온>을 극장용이 아닌 비디오용 소프트로 출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항상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미이케 타카시, 이미 거장이 된 쿠로사와 키요시 등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공포영화 감독들도 독립영화계에서 경험과 내공을 쌓은 뒤 제도권으로 진출한 인물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르영화를 무기로 나타난 <아즈미>의 키타무라 감독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상업영화의 최고봉이 되어 헐리우드로 건너가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밝혔을 정도로 관객에게 철저히 서비스한다는 작품관을 갖고 있다. 장르영화의 핵심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키타무라 감독의 시각은 팔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철저한 경쟁의 세계에서 직접 몸을 부대끼고 터득한 지혜인 것이다. 초창기의 날카로움이 어느 정도 무뎌지기는 했지만, <아즈미>에서도 그의 재기 넘치는 연출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는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재로부터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뽑아낸다(핏빛 장미를 물고 우아하게 일본도를 휘두르는 백의의 비죠마루!). 키타무라 감독의 독특한 영상 감각과 메이저 영화사의 자본이 행복하게 만난 결과로, 제도권 바깥과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영화계의 이중구조가 가져다 준 혜택이기도 하다.

일본의 장르영화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만은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과 변수가 존재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를 소비하는 다양한 취향의 관객층과 이들을 만족시키는 데 충분할 만큼 축적된 컨텐츠, 그리고 그 확대/재생산을 진두지휘하는 감독들의 존재가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즈미>는 그러한 일본 장르영화의 특성이 하나의 작품에 모두 응축된 예이다.

키타무라 류헤이 (北村龍平)

1969년 오사카에서 출생. 17세 때 호주로 건너가 시드니 영상예술학교 영화과에 입학. 졸업 작품인 단편 <엑시트>가 연간 최우수 감독상과 코닥 어워드를 수상. 일본으로 돌아간 뒤 영화집단 네이팜 필름을 설립. 단 30만 엔의 제작비로 10일만에 완성한 액션 호러영화 <다운 투 헬>로 제1회 인디즈 무비 페스티벌 그랑프리를 수상. 이후 느와르 <히트 애프터 다크>를 거쳐 장편영화 데뷔작 <버서스>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음.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은 그의 최대 흥행작이며,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괴수영화 고지라 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 <고지라: 파이널 워즈>를 작업하고 있음. 이외에도 <지옥갑자원>(야마구치 유다이 감독)을 제작하였으며, TV 드라마 <스카이 하이>, 인기 비디오 게임 <메탈 기어 솔리드: 트윈 스네이크>의 데모 영상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 중.

작품목록
<다운 투 헬> (1997)
<히트 애프터 다크> (1999)
<버서스> (2000)
<얼라이브> (2002)
<잼 필름즈> (2002 / <메신저> 에피소드 연출)
<아라가미> (2002)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2003)
<스카이 하이: 극장판> (2003)
<고지라: 파이널 워즈> (2004년 12월 공개 예정 / 현재 촬영중)

– 브레이크뉴스에 실은 글. 게재된 날은 2004년 6월 26일이다.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다.

[둠즈데이] (2008)

(C) Rogue Pictures
(C) Rogue Pictures

<둠즈데이>(Doomsday)는 7, 80년대 SF/액션/판타지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이다. 닐 마셜 감독은 존 카펜터의 ‘탈출’ 시리즈와 <매드 맥스> 시리즈, <오메가 맨>, <엑스칼리버> 등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들로부터 줄거리는 물론 세계관과 인물 설정, 대사, 특정한 장면들, 미장센, 연출 스타일까지 몽땅 재료 삼아 <둠즈데이>라는 반죽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동일한 인물들이 계속 나올 뿐 어디선가 본 장면으로 가득하고, 장르는 20분마다 한 번씩 바뀐다. 어떤 컷이 SF라면 그 다음 컷에서 갑자기 중세 판타지가 시작된다는 식이다. 실은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성격, 외모, 입버릇도 예전 무슨무슨 영화에서 본 그대로이다. 얼핏 <둠즈데이>는 창의성과는 담을 쌓은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저 그런 짜깁기 영화로 넘겨버리기에는 이 영화의 매력이 만만찮다. 반죽이란 재료의 맛에 익숙한 사람에게 즐거움과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가 뒤섞이면서 내는 오묘하고 새로운 맛은 먹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문제는 누구나 그런 반죽을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뒤섞는다고 맛있는 반죽이 되는 건 아니니까. 다행히 닐 마셜은 재능 있고 훌륭한 요리사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재료의 맛과 반죽 만드는 일 자체를 즐기고 사랑한다.

<둠즈데이>에는 프레임 사이마다 옛 장르영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배어있다. 장면을 무턱대고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의 어떤 점을 골라내어 살려야 할지,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앞섰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모든 고민은 단 한 가지 목적을 향하고 있다. ‘나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싶다’는 열망이다. 감독의 그러한 열망은 영화에 질려버릴 정도의 추진력을 부여했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액션과 유혈로 이루어진 <둠즈데이>의 톡 쏘는 맛에 심장이 격렬히 고동치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다. 닐 마셜이 안내하는 이 죽음의 고속 질주에는 틀림없이 동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원제: Doomsday
감독: 닐 마셜
주연: 로나 미트라, 밥 호스킨스, 맬컴 맥도웰, 알렉산더 시디그, 데이비드 오하라
영국 개봉: 2008년 5월 9일
한국 개봉: 2008년 6월 19일

[인디애나 존스와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2008)

(C) Lucasfilm
(C) Lucasfilm

19년 만에 나온 이 속편은 ‘보는’ 영화라기보다는 ‘만나는’ 영화이다. 출연진과 제작진 상당수가 그랬듯이, 관객들에게도 이 영화는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반갑고 향수어린 동창회에 참석하는 듯한 경험이다. 올해 66세인 해리슨 포드는 도입부에서 인디의 입을 빌려 잘나가던 건 젊었을 때 이야기라며 스스로 늙었음을 시인한다.

사실은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시리즈 3편과 4편 사이에 놓인 19년이라는 간극은 영화 속 인디와 영화 밖 해리슨, 그리고 관객 모두에게 해당된다. 우리가 이 모험담 연작을 보고 즐기며 인디-해리슨과 함께 나이를 먹어온 것을 이 영화는 애써 숨기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은 2008년의 기술로 만들어진 1980년대 영화처럼 보인다.

1930년대를 무대로 했던 앞선 세 편과는 달리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의 현재 시점은 1950년대이고, 적은 나치가 아니라 소련군이며 매카시즘과 로큰롤, 폭주족, 핵폭탄, 로스웰 등 시대를 반영한 새로운 설정과 등장인물, 볼거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인디 시리즈를 몇 번이고 반복 감상하다 못해 되새김질까지 해 온 팬들은 이야기가 전환점에서 어느 방향을 택할 지 거의 틀리지 않고 맞힐 수 있다(게다가 비슷한 영화도 많이 나와 있고). 심지어는 결말도 웬만큼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시리즈의 전통이나 몇몇 약속의 전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장면 구도마저 그대로 반복되거나 적절한 선에서 변주된다. 존 윌리엄스는 틈만 나면 귀에 익은 선율을 들려 준다. 뭔가 새로운 것, 압도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고루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디의 귀환을 오랜 시간 기다려온 팬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인디와 함께 열아홉 살을 더 먹은 그들은 늙어서 얼굴 피부가 처지고, 주름이 그려졌을망정 예전의 활력만은 그대로인 인디와 매리언을 보며 반가움과 향수 그리고 동질감을 느낄 것이다. 군데군데 약간씩 호흡이 달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는 당신이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흥분을 되살리기에 충분할 만큼의 즐거움이 들어있다. 그 흥분이야말로 팬들이 극장에서 다시 경험하고 싶은 것이며,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 선사할 수 있는 가치이다.

이것은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작품이 절대로 아니고, 올해 최고의 영화도 아니다. 관객의 정신세계를 고양할 걸작은 더더욱 아니다(애초에 그럴 필요조차 없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와 해리슨 포드의 가장 훌륭한 작품도 아니다. 그렇지만 인디애나 존스와 함께 사이좋게 시간의 세례를 받아온 팬들에게,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은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한 선물이다.

원제: Indiana Jones and the Kingdom of the Crystal Skull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해리슨 포드, 샤이어 라버프, 케이트 블란쳇, 캐런 앨런, 레이 윈스턴
북미 개봉: 2008년 5월 22일
한국 개봉: 2008년 5월 22일

[프라이트 나이트] (1985)

(C) Columbia Pictures
(C) Columbia Pictures

장르란, 관객이 특정한 종류의 영화를 꾸준히 찾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제작자가 비슷한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장르는 영화의 종류를 구분하는 일종의 지표 역할을 하며, 관객에게 어떤 장르에 대한 일정 수준의 기대치를 갖게끔 한다. 이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비율은 장르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 낮아진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관객이 장르영화를 계속 봄에 따라 해당 장르의 구성 요소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를 만드는 쪽에서는 이미 식상해진 장르의 규칙 혹은 불문율을 어떤 방법으로 변형하고 참신하게 포장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프라이트 나이트>는 공포영화, 특히 흡혈귀 영화의 장르 특성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당대의 유행을 잘 조화시켜 식상함을 영리하게 피한 수작이다. 이 영화에는 고전 흡혈귀 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인용은 물론, 80년대 당시의 록 음악이나 사춘기 청소년의 일상도 그럴 듯하게 버무려져 있다. 80년대는 흡혈귀 영화의 전성기가 아니었지만, 이 영화는 철저히 동시대의 눈높이에 맞춤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심야 공포 TV 시리즈 <프라이트 나이트>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청년 찰리는 어느 날 옆집에 사는 두 남자가 흡혈귀와 그 하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최근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살인 사건에 이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간파한 찰리는 경찰에 신고도 하고 홀어머니를 설득해 보기도 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자신이 의심 받고 있음을 알게 된 흡혈귀는 다음 목표물로 찰리를 선택하고, 궁지에 몰린 찰리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자칭 ‘흡혈귀 사냥꾼’인 <프라이트 나이트>의 주인공 피터 빈센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와 현실이 만나는 놀라운 마법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톰 홀랜드 감독의 연출은 때때로 멋진 장면을 선사한다. 나이트클럽 시퀀스와 찰리의 여자친구 에이미가 제리에게 물리는 장면은 감각적인 영상과 분위기로 에로티시즘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프라이트 나이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찰리의 친구 에드가 흡혈귀 제리에게 물리기 직전, 카메라가 에드를 갑자기 부감으로 잡는 대목이다. 카메라의 제3자 시점이 일순간 흡혈귀의 주관적 시점으로 바뀌면서 관객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정교한 특수효과에도 만만찮게 빚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매력적인 한 편으로 만드는 요인은 주역을 맡은 두 배우, 크리스 새런든과 로디 맥도월이다. 제리를 연기한 새런든은 섹시하고 능글맞으며 유머가 풍부한 배역을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소화해 냈다. 그의 변화무쌍한 표정과 전율할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는 ‘이 정도라면 나도 한번쯤은 흡혈귀가…’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피터 빈센트 역의 맥도월은 피터 쿠싱을 흉내 낸 재미있는 액센트로 가끔은 우스꽝스러운 흡혈귀와의 대결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그가 출연한 텔레비전 속 흡혈귀 영화 클립은 정말 즐겁다). 새런든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연기를, 맥도월은 연륜에서 비롯된 관록으로 균형 잡힌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이 서로 다르지만, 이 멋진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프라이트 나이트>는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며, 전편을 지탱하는 두 축을 잃은 채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장르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당대의 감각에 적절히 이식한 연출력 덕택에, <프라이트 나이트>는 80년대 흡혈귀 영화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다. 좋은 장르영화의 본보기이다.

원제: Fright Night
감독: 톰 홀랜드
주연: 크리스 새런든, 로디 맥도월, 윌리엄 랙즈데일, 어맨다 비어즈, 스티븐 제프리즈
북미 개봉: 1985년 8월 2일
한국 개봉: 1986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