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스] (2012)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어벤저스>(The Avengers)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을 보아 왔다. 한 편에 한 명 또는 그 이상씩 소개된 수퍼히어로와 그 주변 등장인물들은 우리에게 현실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사실상 무엇이든 가능할 법한 어떤 세계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었다. 이제,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어벤저스>에서 우리는 그 세계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 영화 세계, 이하 MCU) – 속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떠난다.

MCU를 이루는 모든 영화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인크레더블 헐크>는 매력적인 구석이 제법 있었지만 연출과 각본의 전체적인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아이언 맨 2>와 <토르>,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는 그보다 나았지만, 기적적으로 균형을 맞춤으로써 수퍼히어로 영화의 모범사례가 된 첫 편 <아이언 맨>의 만듦새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MCU는 편을 거듭하면서 하나의 가상 세계를 만들기 위한 기초공사를 차근차근 다져왔다. 마블 스튜디오가 거의 매년 연작을 내면서 평작은 있을망정 어느 한 작품 파탄되지 않도록 품질 유지를 해 온 것은 사실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반면 MCU에 대해 ‘2시간짜리 예고편’이니 ‘떡밥 제조기’이니 하며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건 나쁜 면만을 보려는 비틀린 시선이었다고 본다.

<어벤저스>는 MCU 영화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인 작품으로서도 가치 있음을 증명해 낸다. 마블 스튜디오가 조스 위든에게 <어벤저스>의 연출을 맡긴 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MCU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압축하여 추출했을 때 결국 캐릭터와 배경을 구축한다는 것만 남는다면, 위든이야말로 그 정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감독 가운데 한 명인 것이다. 그건 영화가 시작된 지 단 몇 분이면 알 수 있다. 위든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우주에서 온 신도 있다)이 같은 목적 아래 모였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경제적으로 엮어낸다. 플롯보다는 캐릭터가 우선인 이야기에서 이 경제성은 빛을 발하고, 이미 탄탄하게 구축된 성격과 설정이 이에 맞물려 상상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한다. 한 편의 이야기에 허락된 범위 안에서 놀라우리만치 넓고 깊이가 있으며 다양한 에피소드가 기름이 잘 먹은 톱니바퀴처럼 촘촘하면서도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어떤 캐릭터도 ‘분량’이나 ‘비중’이라는 괴물에 희생되지 않는다.

아울러 위든은 그 조밀한 틈과 틈 사이까지도 든든하게 채워 넣는다. 얄미울 만큼 영리한 유머와 위트, 그리고 일급의 스펙터클로 말이다. 이미 잘 짜인 이야기에 환상적인 조미료가 더해지자, <어벤저스>는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범주를 넘어 여름 블록버스터로서도 최상의 수준에 도달한다. 비범한 존재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있을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수퍼히어로 신화의 전형적인 포맷이지만, <어벤저스>는 전례 없이 커져 버린 규모임에도 길을 잃지 않는다. 여태까지 이런 소재를 이토록 훌륭하게 빚어낸 헐리우드 수퍼히어로 영화는 <스파이더맨 2>와 <X-멘: 퍼스트 클래스>, 그리고 <다크 나이트> 정도밖에 없다.

<아이언 맨>이후 4년을 기다렸던 영화. 그리고 수퍼히어로라는, 알록달록한 스판덱스나 갑옷을 입은 힘세고 영리한 존재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어떤 이들은 반생을 기다려야 했을 영화. 나는 그들에게 <어벤저스>가 ‘기다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어벤저스>는 영화를 이루는 모든 순간, 심지어는 프레임 한 조각까지도 그들을 위한 선물꾸러미로 가득 차 있는 행복한 축제이다.

원제: The Avengers
감독: 조스 위든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스칼렛 조핸슨, 제레미 레너, 새뮤얼 L. 잭슨
북미 개봉: 2012년 5월 4일
한국 개봉: 2012년 4월 26일

[크로니클] (2012)

(C) 20th Century Fox
(C) 20th Century Fox

<크로니클>(Chronicle)이 흥미로운 까닭은 다른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던(또는 다루지 않았던) 주제, 그러니까 초능력을 도덕성이나 책임감으로 통제한다는 개념이 없어져 버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과감히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은 기껏해야 일장연설이나 그에 가까운 무언가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길로 빠지기엔 너무나도 팔팔하다. 젊고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빼면 삶의 모든 면에서 울퉁불퉁한 길을 끝도 없이 달리는 것만 같은 사춘기라는 시기. 초능력(그 근원과 정체는 극중에서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은 그 시기의 불안정한 마음의 빈틈에 재빨리 파고든다. 남은 것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는 것 뿐.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은 세 사람이 하나같이 수퍼히어로가 된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는 가짜가 아닐까라는 불경스러운(?) 생각마저 잠시 든다.

<크로니클>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사춘기를 소재로 한 <캐리>나 <미러, 미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존재들을 그린 <아키라>, <스캐너즈> 같은 장르영화/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한 관점에서라면 <크로니클>도 그다지 새로운 작품은 아니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의 재활용에 불과할 수도 있다. 캠코더와 CCTV 등의 시점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발견된 영상’ 연출 기법도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크로니클>은 결코 낡지 않았다. 그 속에는 폭발하듯 강렬하고 생생한, 때때로 보는 이의 마음을 할퀴곤 하는 감정으로 가득하고, 다소 전형적이지만 성실한 연기로 표현되어 동정심과 관심을 기울일 만한 등장인물이 있으며, 어두운 동굴 속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연출이 있다. 이야기 두루마리가 놀라운 속도로 풀리면서 그 핵심으로 집중해 가는 전개는 압도적이다. 피로감마저 느껴질 법한 수퍼히어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이 정도로 힘 있고 균형 잡힌 작품을 찾는 건 의외로 쉽지 않다.

마지막 장면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장면이 흘러가는 동안 관찰자인 나, 보는 이와 기록자인 카메라의 시점이 주인공의 시점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주인공의 눈이 되어, 아니 주인공 그 자신이 되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럼으로써 나는 주인공이 꿈꾸었던 피안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가 왜 멈추지 못했는지를, 비극 속에서도 그의 모습이 왜 그토록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웠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얄밉게도 바로 그 순간 영화는 끝난다. 궁금증을 몹시도 자극하는 미스테리 몇 가지가 남는데, 그것은 속편에서 밝혀질지도 모르겠다. 엔드 크레딧을 천천히 넘겨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 연대기(chronicle)의 다음 장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 ‘힘’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원제: Chronicle
감독: 조쉬 트랭크
주연: 데인 드한, 알렉스 러셀, 마이클 B. 조던, 마이클 켈리, 애쉴리 힌쇼
북미 개봉: 2012년 2월 3일
한국 개봉: 2012년 3월 15일

[X-멘: 퍼스트 클래스] (2011)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X-멘>과 그 속편 <X2>가 그토록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는 인간의 편견과 그것으로부터 가지를 친 차별과 소외,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틀에 요령 있게 녹여냄으로써, 대중영화/장르영화의 참신한 전범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싱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고통 받아야 했던 뮤턴트들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락은 물론 주제 의식도 탄탄하게 갖춘 수퍼히어로 영화를 빚어냈다. 내가 보기에 이들 두 편의 영화, 특히 제1편 <X-멘>은 수퍼히어로 영화 붐의 결정적인 촉발점이 된 <스파이더맨> 이전에 이미 21세기 수퍼히어로 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분명한 주제 의식, 현실의 물리법칙을 최대한 준수하면서도 수퍼히어로의 신화적 매력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은 세밀하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은 <X-멘>의 뒤를 이었던 수많은 수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불과 몇 편만이 제대로 이뤄냈을 뿐이다.

싱어는 이 프리퀄 <X-멘: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작자로 물러났고, 이번에는 <킥애스>로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뽐냈던 매튜 본이 감독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싱어가 <X-멘>과 <X2>에서 유지했던 핵심은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그 빛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로 시대 배경을 다소 느슨하게 제시했던 전편과는 달리 약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그린 <퍼스트 클래스>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 60년대 인권운동이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현대사와 X-멘의 결성이라는 수퍼히어로 세계의 신화를 과감히 연결한다. 이야기의 시공간은 더욱 구체적으로 설정되고, 전편에서 불거졌던 갈등의 원인과 숨겨졌던 이야기들이 밝혀지면서 X-멘의 영화 세계는 한층 더 복잡해지고 생동감을 띤다. <퍼스트 클래스>는 단순히 X-멘 영화 시리즈 여기저기에 뚫린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임무를 아주 훌륭히 수행하는 것은 물론, X-멘 영화 세계를 의미 있게 확장한다.

<퍼스트 클래스>의 연출이 완전무결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편보다 등장인물이 두세 배는 늘어났고 그 대부분은 뮤턴트다. 아마도 그들의 초능력을 하나씩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상영시간의 절반은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X-멘 결성이라는 중요한 플롯 포인트를 엮어야 하고, 제목이 뜻하는 바에 맞춰 뮤턴트들이 훈련할 시간도 필요하다. 프리퀄이니만큼 X교수, 매그니토, 미스틱 등 주요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발굴, 발전시키되 전편과 무리 없이 연결시켜야 하고, 조단역급 뮤턴트들도 다루어야 한다. 원작 및 전편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인용과 서비스도 군데군데 뿌려 두어야 한다(그 중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것들도 몇 가지 있다). 여름 블록버스터 전쟁 참전작이니 액션과 시각효과도 잘 짜 넣어야 한다. 장면이 매우 빠르게 바뀌어 가고, 그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와 새로운 초능력을 선보이거나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는 등 계속해서 못 보던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정보량이 아무튼 굉장히 많다. 집중해서 보아야 하고, 가능하면 두어 번 다시 보기를 권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구성상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퍼스트 클래스>는 기적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100%는 아니지만, 98% 이상이라고 할까. 단 한 장면도 낭비되지 않았고, 묘사는 간결하며 군살이 없다. 어쩌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 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거슬릴 만큼은 아니다. 보고 나면 이야기와 주제가 깔끔히 정리된다. 무엇보다도 <X-멘>과 <X2>의 유전자를 한 톨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계승하고 있어 그 매력과 향기를 한껏 느낄 수 있으니 기쁘다. 배우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등장인물을 살아 숨쉬도록 연기했지만, 특히 제임스 매커보이와 마이클 파스벤더는 뛰어나다. 케빈 베이컨도 제법 위협적인 악역을 잘 소화했다. 그야말로 발군의 만듦새. 전편의 완성도에 버금가는 것은 물론, <아이언 맨>이나 <스파이더맨> 1, 2편을 잇는 ‘최고의 마블 수퍼히어로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X-멘: 최후의 전쟁>과 <X-멘 탄생: 울버린>에 실망했던 팬이라면, <퍼스트 클래스>는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작품이다. 사실 이것은 보통 단비가 아니다. <퍼스트 클래스>는 멋진 X-멘 영화에 목말라 있었던 팬들을 촉촉하고 따뜻하게 적셔 주고, 그들의 가슴을 힘차게 뛰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바라 왔던 바로 그 X-멘 영화, 아니, 분명히 그 이상이다.

원제: X-Men: First Class
감독: 매튜 본
주연: 제임스 매커보이, 마이클 파스벤더, 제니퍼 로렌스, 케빈 베이컨, 니콜라스 홀트
북미 개봉: 2011년 6월 3일
한국 개봉: 2011년 6월 2일

[아이언 맨 2] (2010)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아이언 맨 2>(Iron Man 2)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토니 스타크가 자신이 아이언 맨임을 공언하면서 기자회견장을 패닉에 빠트리는 모습을 저 멀리 러시아에 있는 어떤 허름한 골방에서 다시 보게 된다. 이곳에서는 한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있고, 그의 아들은 슬픔을 이겨내고자 보드카를 연신 들이킨다. 마침내 노인이 죽고 아들의 슬픔은 분노로 변한다. 토니 스타크 / 아이언 맨의 새로운 적, 이반 반코 / 윕래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번 속편의 적은 윕래쉬 한 명만이 아니다.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스타크로부터 아이언 맨 수트를 압수하려 하고, 틈만 나면 그를 물어뜯으려는 라이벌 군수업자 저스틴 해머는 윕래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강력한 위협 세력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타크의 회사는 경영실적이 악화되고 있고, 스타크 자신은 아이언 맨으로서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자아도취와 자연인 토니 스타크로서 수트 착용 후유증의 괴로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학적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다.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니 관객은 불안해진다. 이러다 <배트맨 & 로빈> 꼴이 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건 너무 심한 가정이고 최소한 <스파이더맨 3> 만큼은 해 줘야 할 텐데.

전편의 공식을 별다른 의미 없이 반복하거나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고 쓰러지는 다른 속편들에 비하면, 다행히도 <아이언 맨 2>는 군계일학이다. 존 파브로 감독과 저스틴 서루 작가는 전편의 황금공식에 적절한, 때로는 과감한 변화를 주면서, 수퍼히어로 영화로서는 일반적인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호평을 받았던 <아이언 맨>의 속편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착실하게 해냈다. 우리는 스타크와 페퍼 포츠, 로디, 해피 등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이 망가지지 않은 채 유머와 호통을 주고받는 모습을 여전히 즐길 수 있다. 히어로가 ‘실존’하는 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존’과도 맞서 싸우며 결국 슬기롭게 극복하는 왕도 전개도 비교적 탄탄하다. 이 과정에서 조금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를 대비해 적절히 치고 들어오는 볼거리와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어벤저스> 떡밥이 도처에 마련되어 있다.

배우들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매력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활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조차 밉지 않다. 귀네스 팰트로우가 분한 페퍼 포츠와의 티격태격하는 궁합도 여전히 좋다. 그는 스타크 때문에 덜컥 CEO가 되다 보니 짜증이 좀 늘긴 했다. 배우 교체로 말이 많았던 로디는 돈 치들의 이미지 때문에 좀 뺀질거리고 경박한 느낌이 줄어든 대신, 모두가 기대했던 새로운 히어로 워 머신으로서 짊어져야 할 비중을 잘 받아냈다. 저스틴 해머는 좀 뻔한 악역이지만 샘 록웰의 노련미가 이를 충분히 상쇄했고, 윕래쉬는 미키 루크의 현재 이미지를 잘 살린 터프하고 카리스마 있는 악역이다.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늘어나 가장 큰 손해를 본 쪽은 블랙 위도우 역의 스칼렛 조핸슨이다. 배역과 그 비중이 얄팍해졌으니 배우 자신의 재능도 제대로 쓰여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새뮤얼 L. 잭슨의 닉 퓨리는 떡밥 투척자로서 제 역할을 다 했다. 액션과 물량공세는 어떨까. 전편의 키워드가 아이언 맨 수트라는 궁극의 장난감을 구경한다는 신기함과 초음속으로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 등이었다면, 이번 속편에서는 아무래도 처음의 설렘은 조금 덜한 대신 이미 탄탄하게 확립된 세계관에서 가능한 화려하고 다양한 변화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휴대용 수트 ‘마크 V’는 정말로 탐이 난다.

<아이언 맨 2>는 전편의 장점과 매력을 충실히 유지하면서 속편의 규모 증대로 인한 이야기의 파탄을 납득할 수 있는 선까지 최선을 다해 막아냈다. 중반의 늘어짐이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면 전편을 즐겼던 팬들도 실망하지 않을 만하다. 그리고, <어벤저스>에도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

원제: Iron Man 2
감독: 존 파브로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귀네스 팰트로우, 돈 치들, 미키 루크, 샘 록웰
북미 개봉: 2010년 5월 7일
한국 개봉: 2010년 4월 29일

[핸콕] (2008)

(C) Columbia Pictures
(C) Columbia Pictures

수퍼히어로 존 핸콕은 LA의 골칫거리이다. 그는 주정뱅이에 성질도 더러운 민폐 덩어리여서 트러블을 해결하려다 자신이 트러블이 되고 마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바로 그 트러블 때문에 목숨을 건진 PR 전문가 레이가 보답으로 핸콕의 이미지 교정에 나선다. 핸콕은 점차 시민들의 신뢰를 얻어가지만, 한편으로 레이의 아내 메리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윌 스미스 영화이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반항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주인공이 어떤 상황이나 집단과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경쾌한 코믹 터치로 그리는 것이다. 배우의 이미지와 수퍼히어로 영화의 공식을 재치 있게 뒤튼 극중 상황은 템포가 좋고 시각효과도 훌륭하다(<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담당했던 존 다이크스트라의 솜씨이다). 그런데 문제의 중반에서, 영화는 관객의 예측을 아득히 초월하며 급선회한다. 당신들은 모두 낚였다. <핸콕>의 예고편은 <식스 센스>가 울고 갈 정도로 만선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가벼운 수퍼히어로 코미디는 심각하고 어두운 수퍼히어로 드라마로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대목에서 코미디로 시작했다가 억지 눈물 짜기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다시 코미디로 끝나는 숱한 한국영화를 떠올리며 잠깐 위기감을 느꼈다. 잔뜩 과장된 음악이 울려퍼지고 고양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한술 더 떠 이 영화에는 수퍼히어로의 적이 없다. 아니, 명목상의 적은 있지만 주인공이 싸워야 할 진짜 상대는 아니다. <핸콕>의 카타르시스는 기존 수퍼히어로 영화와 다르다. 관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호오가 극명하게 엇갈릴 만하다. 하지만, 수퍼히어로라는 존재가 기본적으로 ‘물 밖에 나온 물고기’임을 이해한다면, 핸콕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핸콕>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약간의 무리수를 둔 건 분명하다. 수퍼히어로의 내면에 처음으로 시선을 돌린 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예전보다 더 직관적이고 더 집요하게 피사체를 뒤쫓고 있다. 관객의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며 주제를 다루는 방법은 흥미롭다. 완벽하게 성공한 건 아니지만, 이런 수퍼히어로 영화가 하나쯤 있어도 재미있다.

원제: Hancock
감독: 피터 버그
주연: 윌 스미스, 샬리즈 테론, 제이슨 베이트먼, 제이 헤드, 에디 마산
북미 개봉: 2008년 7월 2일
한국 개봉: 2008년 7월 2일

[아이언 맨] (2008)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아이언 맨>(Iron Man)을 보고 나서 느낀 것은 2002년 <스파이더맨>을 처음 본 뒤의 감동 그대로였다. 이야기와 캐릭터, 액션과 유머, 주제와 표현이 조화를 이룬 제대로 된 수퍼히어로 영화를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만났다는. 그러나 <스파이더맨> 이후 마블 영화는 부침이 심했다. <헐크>는 지나치게 진지했고(물론, 나는 그런 접근 방식도 좋아했지만), <데어데블>과 <엘렉트라>, <판타스틱 포>는 너무 얄팍했다. < X-멘 > 시리즈는 3편에서 1, 2편의 아우라를 잃었다. <스파이더맨 3>마저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이대로 가다간 마블 영화에 질려버릴 것만 같았던 바로 그때, 이 철갑 사나이가 나타난 것이다.

<아이언 맨>은 균형잡힌 수퍼히어로 영화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명확한 캐릭터, 완급이 잘 조절된 이야기 연출, 충분한 볼거리 등 성공적인 오락영화의 3박자가 맞아 떨어진다. 각본에 전혀 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작품 전체에 스며든 활기가 거슬리지 않게 가려 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는 캐스팅이 빛을 발한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귀네스 팰트로우의 궁합은 환상적이다. 특히 다우니 주니어의 토니 스타크는 예측불허의 사고뭉치가 수퍼히어로로 변모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다. 돈이 너무 많고 머리도 지나치게 좋은 그는 타락의 가능성도 아슬아슬하게 보여 주는데, 이에 대해서는 속편에서 더 상세히 다루어질 것 같다. <아이언 맨>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결론을 섣불리 내리지 말 것이다.

원제: Iron Man
감독: 존 파브로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귀네스 팰트로우, 테렌스 하워드, 제프 브리지스, 클라크 그렉
북미 개봉: 2008년 5월 2일
한국 개봉: 2008년 4월 30일

 

[스파이더맨 3] (2007)

(C) Sony Pictures
(C) Sony Pictures

여전히 좋았지만, 조금 과했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 진이 빠질 정도다. 결말에 다다를 때쯤이면, ‘자, 베놈하고 샌드맨 보냈으니 그 다음은 얼른 내려가서 해리, 그 다음은 결혼 반지…’ 이렇게 벌여 놓은 사건들을 수습하기에 바쁘다.

놀라운 점은 그것들이 어떻게든 모두 수습된다는 것이며, 주제와의 연관성이나 에피소드 사이의 짜임새의 파탄도 잘 막아 놔서 작품의 전체적인 질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얽혔으니 잘못하면 <배트맨 & 로빈>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작가들과 감독은 최선을 다 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역시 샌드맨과 뉴 고블린만으로 만들어야 했어, 싶지만 베놈이 없었다면 영화가 이만큼 화제를 모을 수 있었을까. 놈의 등장을 암시하는 정도로 끝냈다면 더 좋았겠지만, 팬들의 인내심은 3편을 넘기지 못했을 테니까.

액션 장면에 대해선 정말 할 말이 없다. 압도적이다. <스파이더맨 3>는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 그 자체이다. 또한, 플린트 마르코가 샌드맨으로 부활하는 대목은 <배트맨 리턴즈> 이후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악당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이미 4편 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지만, 피터 파커의 성장담은 이쯤에서 완결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원제: Spider-Man 3
감독: 샘 레이미
주연: 토비 맥과이어, 키어스틴 던스트, 제임스 프랭코, 토머스 헤이든 처치, 토퍼 그레이스
북미 개봉: 2007년 5월 4일
한국 개봉: 2007년 5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