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 맨 3] (2013)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아이언 맨 3>(Iron Man 3)는 과연 제3편답게 헐리우드 영화의 3부작 공식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즉, 제1편이라는 과거 또는 그 대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밝히거나, 당시 등장인물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저지르고 말았던 원죄를 캐내는 것이다. <아이언 맨> 시리즈이기 때문에 달라진 점이라면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의 힘이 워낙 세기 때문에, 이러한 3부작 공식을 적용할 경우 그 어느 때보다도 토니의 시점에 따르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언 맨 3>는 시리즈 가운데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감정적이다. 다행히 토니 스타크는 앞선 작품들을 통해 훌륭하게 구축이 되어 온 캐릭터여서, 설사 공식에 얽매인다 해도 우리가 그의 말에 한껏 집중하고 공감을 표하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또한, <아이언 맨 3>는 지금까지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 영화들이 <어벤저스>로의 기반을 놓기 위한 중간 단계 역할을 하는 데 적지 않은 힘을 분산하는 바람에, 독자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이 다소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단점으로부터도 상당히 자유로워져 있다. MCU 제1단계가 전작 <어벤저스>로 수렴, 일단락했고 이 과정에서 가상 세계가 충분히 만들어진 상태라 <아이언 맨 3>는 이를테면 건물을 지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이미 지어진 건물 안에서 신나게 놀면서 가끔 벽에 새 그림을 걸거나 정원의 잔디를 다듬는 정도만 하면 되었다. 그 덕택에 이 영화는 남는 시간에 자기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낼 수 있었고, MCU 중에서도 특히 독자성이 강한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장르/스타일 면에서 <아이언 맨 3>는 전형적인 수퍼히어로 영화라기보다, 위험한 첨단기술을 둘러싼 음모를 결합시킨 테크노 스릴러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전작의 성공 요인이었던 캐릭터 코미디와 주제의 연결성도 여전히 탄탄하고, 제1장의 마지막과 클라이맥스는 대규모 스펙터클로 수퍼히어로 액션을 고대했던 관객을 한껏 만족시켜 준다. 중반부 약간의 늘어짐과 적의 정체를 둘러싼 전개에서 좀 뻔한 수가 들여다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흐름이 유연하고 극의 다른 부분들이 단점을 만회하고도 남는다. 완성도 면에서 이상적인 수퍼히어로 영화로 꼽히는 제1편에 그리 뒤지지 않는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귀네스 팰트로우의 연기 궁합은 언제나처럼 훌륭하지만, 여기에 관록이 더해져 더욱 보기 좋다. 벤 킹슬리는 재미있는 악역을 탁월한 감각으로 소화했는데, 화면에 나올 때마다 눈과 귀를 휘어잡는다. 마블 수퍼히어로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사악하고 강력한 악역을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연기한 가이 피어스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자비스는 아무래도 폴 베타니의 목소리를 지닌 인공지능이 맞는 것 같다. 편을 거듭할 수록 더 인간다워지지 않는가.

시각효과와 액션 연출 면에서는 앞선 두 편에서 갑옷 대 갑옷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 갑옷과 생체병기의 대결을 묘사함으로써 시각적으로 확실한 차별점을 만들어 냈다. 수트의 각부 분리를 활용한 재치 있고 박력 넘치는 액션 설계와 이를 절묘하게 변주하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웃음을 이끌어 내는 영리한 코미디도 좋다.

토니와 갑옷(수트)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그의 성장을 묘사한 구성도 의미가 있었다. <아이언 맨> 시리즈는 항상 덜 자란 남자 토니가 갑옷을 계속해서 갈아입으며 자신에게 맞는 옷(또는 자리)을 찾는 과정을 그려 왔으니까. 단 한 번 고치에 갇혀 있다 성충이 되는 나비와는 달리, 인간이기에 스스로의 모습을 찾고자 몇 번이고 변태를 거듭해야 했지만 말이다. 페퍼와의 로맨스도 전보다 훨씬 더 강한 감정으로 표현되었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사랑은 두 연인 사이를 더욱 힘껏 묶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계약 관계 같은 ‘어른의 사정’ 때문에 이 영화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 맨으로 분하는 마지막 단독 출연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있다. 확실히, 이 영화는 MCU를 이루는 한 작품이 아니라 ‘아이언 맨 3부작’의 완결편 같은 느낌이다. 물론 토니 스타크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우니 주니어가 어른의 사정을 뛰어넘어 앞으로도 계속 갑옷을 입을 가능성도 지금으로서는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아이언 맨 3>가 한 사이클을 매듭짓고 앞으로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원제: Iron Man 3
감독: 셰인 블랙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귀네스 팰트로우, 가이 피어스, 돈 치들, 벤 킹슬리, 존 파브로, 레베카 홀, 폴 베타니
북미 개봉: 2013년 5월 3일
한국 개봉: 2013년 4월 25일

[얼티밋 어벤저스] (2006)

(C) Lions Gate Films, MLG Productions 1, Marvel Studios
(C) Lions Gate Films, MLG Productions 1, Marvel Studios

<얼티밋 어벤저스>(Ultimate Avengers)는 2006년 미국에서 DVD로 발매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은 2002년 발표된 마블 코믹스의 13호짜리 리미티드 시리즈인 [얼티미츠]. 이 [얼티미츠]는 마블이 2000년부터 전개해 온 ‘얼티밋 마블’ 시리즈의 한 편으로, 마블의 수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를 새로운 설정으로 일신하였다. [얼티미츠]가 이 시점에서 흥미를 끄는 까닭은 이 작품이 <아이언 맨>으로 시작하여 <어벤저스>로 1단계의 분수령을 맞은 ‘마블 영화 세계(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MCU)’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쉴드가 직접 어벤저스를 조직한다는 이야기의 뼈대라든가 쉴드의 국장 닉 퓨리가 배우 새뮤얼 L. 잭슨을 모델로 한 흑인으로 바뀌었다는 점 등 MCU 작품들의 주요 설정은 바로 [얼티미츠]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퓨리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의 묘사 등 많은 부분이 서로 다르지만, 반대로 좌충우돌 끝에 성공적으로 첫 번째 임무를 마치는 어벤저스의 탄생 과정이나 치타우리의 지구 침략과 같은 이야기의 얼개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얼티밋 어벤저스>는 [얼티미츠]의 전체 이야기 틀은 유지하되, 각색 과정에서 몇몇 성인 취향의 설정을 주된 관객층인 청소년층에 맞게 완화시켰다. 토니 스타크의 알콜중독과 지병에 관한 내용, 행크 핌과 재닛 반 다인 부부 사이의 가정폭력, 그리고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신했을 때의 외설적인 언행 등이 삭제된 것이다. 원작에서는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주적 치타우리도 여기서는 도입부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상영시간이 1시간 10분 정도로 짧은 편이기 때문에 원작의 많은 디테일이 가지치기되었고, 어벤저스의 결성 과정과 치타우리와의 전투에 집중하며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이러한 각색 방침에는 찬반양론이 있으리라고 본다. 발간 당시의 미국 정세를 반영한 묘사라든가 수퍼히어로들의 어두운 면을 현실적으로 조명하는 원작의 시각에 호감을 가진 팬들이라면 완화된 표현 수위와 가지치기가 불만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이러한 각색에 불만보다는 오히려 흥미가 동한다. 두 매체의 차이를 이모저모 비교해 보는 재미 때문이고,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은 만화보다 분량의 제약을 더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티밋 어벤저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제약 안에서 이야기도 상당히 잘 엮어냈다. 어벤저스라는 소재가 실사영화로 옮기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시기였고, <아이언 맨>을 필두로 한 MCU 프로젝트가 가동하기 전이었으므로 당시로서는 애니메이션이 만화 다음으로 어벤저스의 이야기를 담을 가장 적합한 그릇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작 배경을 감안하면 <얼티밋 어벤저스>는 플롯과 캐릭터가 매우 경제적이고 압축적으로 잘 엮여 있다. 닉 퓨리가 어벤저스를 구성한다는 이야기의 큰 틀과 수퍼히어로 캐릭터들 각자의 뒷이야기와 개성, 그리고 그들이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이 길지 않은 상영시간임에도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인물 묘사는 캡틴 아메리카와 헐크 쪽으로 약간 균형이 기울어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상 필연적인 조처였다. 액션 장면도 풍부하며 박진감과 속도감이 넘치는데다 규모도 크다. 이 모든 것들이 날렵하게 씨줄과 날줄을 이루어 <얼티밋 어벤저스>를 수퍼히어로 애니메이션의 수작으로 만들고 있다.

원제: Ultimate Avengers
총감독: 밥 리처드슨
감독: 커드 게다, 스티븐 E. 고든
주연: 저스틴 그로스, 올리비아 다보, 마크 워든, 안드레 웨어, 그레이 드라일
북미 공개일: 2006년 2월 21일
한국 케이블 TV 방영 (방영 제목 <어벤저스>)

[어벤저스] (2012)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어벤저스>(The Avengers)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을 보아 왔다. 한 편에 한 명 또는 그 이상씩 소개된 수퍼히어로와 그 주변 등장인물들은 우리에게 현실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사실상 무엇이든 가능할 법한 어떤 세계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었다. 이제,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어벤저스>에서 우리는 그 세계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 영화 세계, 이하 MCU) – 속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떠난다.

MCU를 이루는 모든 영화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인크레더블 헐크>는 매력적인 구석이 제법 있었지만 연출과 각본의 전체적인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아이언 맨 2>와 <토르>,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는 그보다 나았지만, 기적적으로 균형을 맞춤으로써 수퍼히어로 영화의 모범사례가 된 첫 편 <아이언 맨>의 만듦새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MCU는 편을 거듭하면서 하나의 가상 세계를 만들기 위한 기초공사를 차근차근 다져왔다. 마블 스튜디오가 거의 매년 연작을 내면서 평작은 있을망정 어느 한 작품 파탄되지 않도록 품질 유지를 해 온 것은 사실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반면 MCU에 대해 ‘2시간짜리 예고편’이니 ‘떡밥 제조기’이니 하며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건 나쁜 면만을 보려는 비틀린 시선이었다고 본다.

<어벤저스>는 MCU 영화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인 작품으로서도 가치 있음을 증명해 낸다. 마블 스튜디오가 조스 위든에게 <어벤저스>의 연출을 맡긴 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MCU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압축하여 추출했을 때 결국 캐릭터와 배경을 구축한다는 것만 남는다면, 위든이야말로 그 정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감독 가운데 한 명인 것이다. 그건 영화가 시작된 지 단 몇 분이면 알 수 있다. 위든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우주에서 온 신도 있다)이 같은 목적 아래 모였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경제적으로 엮어낸다. 플롯보다는 캐릭터가 우선인 이야기에서 이 경제성은 빛을 발하고, 이미 탄탄하게 구축된 성격과 설정이 이에 맞물려 상상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한다. 한 편의 이야기에 허락된 범위 안에서 놀라우리만치 넓고 깊이가 있으며 다양한 에피소드가 기름이 잘 먹은 톱니바퀴처럼 촘촘하면서도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어떤 캐릭터도 ‘분량’이나 ‘비중’이라는 괴물에 희생되지 않는다.

아울러 위든은 그 조밀한 틈과 틈 사이까지도 든든하게 채워 넣는다. 얄미울 만큼 영리한 유머와 위트, 그리고 일급의 스펙터클로 말이다. 이미 잘 짜인 이야기에 환상적인 조미료가 더해지자, <어벤저스>는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범주를 넘어 여름 블록버스터로서도 최상의 수준에 도달한다. 비범한 존재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있을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수퍼히어로 신화의 전형적인 포맷이지만, <어벤저스>는 전례 없이 커져 버린 규모임에도 길을 잃지 않는다. 여태까지 이런 소재를 이토록 훌륭하게 빚어낸 헐리우드 수퍼히어로 영화는 <스파이더맨 2>와 <X-멘: 퍼스트 클래스>, 그리고 <다크 나이트> 정도밖에 없다.

<아이언 맨>이후 4년을 기다렸던 영화. 그리고 수퍼히어로라는, 알록달록한 스판덱스나 갑옷을 입은 힘세고 영리한 존재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어떤 이들은 반생을 기다려야 했을 영화. 나는 그들에게 <어벤저스>가 ‘기다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어벤저스>는 영화를 이루는 모든 순간, 심지어는 프레임 한 조각까지도 그들을 위한 선물꾸러미로 가득 차 있는 행복한 축제이다.

원제: The Avengers
감독: 조스 위든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스칼렛 조핸슨, 제레미 레너, 새뮤얼 L. 잭슨
북미 개봉: 2012년 5월 4일
한국 개봉: 2012년 4월 26일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 (2011)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캡틴 아메리카, 또는 스티브 로저스라는 캐릭터를 떠올릴 때 느끼는 이미지는 강직함과 따뜻함, 이 두 가지다. 그는 굽히느니 부러지겠다는 각오로 불의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고, 포기라는 것을 모르며,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는 것을 끝까지 싸우다 쓰러지는 것보다 굴욕적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약한 자와 동료에게 누구보다도 헌신하는 사람이다. 태어난 이후 꽤 오랫동안 강하다는 것, 남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고 자라왔기에 그는 약한 자의 어려움을 잘 안다. 친구와 동료를 뜨겁게 사랑하기에,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던 친우를 잃은 슬픔은 그를 두고두고 괴롭히기도 한다.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은 자칫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해 가까운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있고, 스스로를 문제에 빠뜨릴 수도 있다. 때때로 그러한 문제들은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다른 이들의 것까지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나중 일일 테고,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탄생을 그린 영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 이하 ‘퍼스트 어벤저’)에서 기대하거나 깊이 다룰 만한 주제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1940년대 2차대전 중에 탄생한 애국주의 수퍼히어로가 70년의 시차를 건너뛰어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퍼스트 어벤저>는 대단히 성공적인 탄생/부활기이다.

다른 훌륭한 수퍼히어로 영화와 마찬가지로, <퍼스트 어벤저>는 대번에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를 선보인다. 비록 몸은 허약하지만 마음 속 심지만은 굳건한 청년이라는 로저스의 각본상 캐릭터 설정과 묘사가 탄탄하고, 다소 경박한 이미지 탓에 캐스팅 당시 나의 기대감을 깎기도 했던 크리스 에반스는 로저스의 강직함과 따뜻함, 긍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정의관을 성실히 표현했다. 따라서 로저스가 완벽한 신체조건을 지닌 초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에반스가 캡틴 아메리카 수트를 입은 모습은 또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멋진가. 이제 크리스 에반스는 캡틴 아메리카이다.

주변 인물들의 묘사에도 공이 들어가 있다. 토미 리 존스의 체스터 필립스 대령, 헤일리 애트웰의 페기 카터, 스탠리 투치의 에이브러햄 어스카인, 도미닉 쿠퍼의 하워드 스타크는 특히 뛰어나다. 이들이 로저스와 맺는 관계와 화학작용은 다채롭고 생동감이 있다. 세바스찬 스탠의 버키 반즈와 덤 덤 두건을 비롯한 하울링 코만도, 리처드 아미티지의 히드라 암살자 하인츠 크루거, 토비 존스의 히드라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르님 졸라 등 웬만한 조역들까지도 골고루,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보는 이가 정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려졌다.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매끄럽고 경쾌하게 흐르는 수퍼히어로 영화의 왕도가 되고, ‘힘은 올바른 정신과 결합했을 때 의미를 지닌다’는 주제를 훌륭히 전달한다. 로저스와 카터의 은근한 로맨스도 기분 좋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수퍼 솔저가 된 로저스가 당초의 바람과는 달리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전쟁채권 및 모병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캡틴의 원작 복장을 마음껏 희화화하기 때문에 만화의 오랜 팬들을 거슬리게 할 위험도 있는 대목이기도 한데, 굉장히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진데다 오래된 수퍼히어로 캐릭터에 쌓인 먼지를 과감하게 털어내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과도기를 거치게 한다는 연출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에 오히려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원작 만화 초기의 프로파간다적 성격과 전쟁/수퍼히어로 영화 장르에 대한 가벼운 패러디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유감스러웠던 부분이 없지는 않다. 악역 레드 스컬 / 요한 슈미트가 그렇다. 때때로 아주 위협적인 모습을 노련하게 풀어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다. 레드 스컬은 캡틴 아메리카를 탄생시킨 것과 같은 혈청으로 초인적인 힘을 얻었지만, 악한 마음도 함께 증폭되었다는 설정의 캐릭터로서 이를테면 <스타 워즈>에서 포스의 어두운 면을 대표하는 다스 베이더와 닮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루크 스카이워커의 자리에 대입할 수 있는 캡틴 아메리카와 테제-안티테제 관계를 좀 더 탐구해 보았더라면 이야기도 더 풍부해졌을 것이고, 레드 스컬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감도 훨씬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레드 스컬은 으름장만 놓다 주인공에게 얻어터지는 단순한 구식 악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근래 수퍼히어로 영화, 특히 마블 영화에서 악당이 주인공 영웅에 비해 약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두드러졌음을 떠올린다면 이것도 이제 하나의 전통이 된 것 같다. 그래도 휴고 위빙이 다소 어색한 독일식 액센트로 대사를 뱉어내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구식’이라서 마음에 든다. 2차대전, 나치, 히틀러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집착, 비밀조직, 스파이, 역사적으로 그 당시에 있을 수 없었던 오버 테크놀로지(여기서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웅의 통쾌한 활약, 복고 취향을 자극하는 세트와 같은 여러 가지 볼거리와 음악, …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레이더스) 같은 과거의 고풍스러운 영웅 이야기에서 이미 멋지게 써먹었던 요소들 아닌가. 또 <퍼스트 어벤저>의 감독 조 존스튼은 비슷한 요소를 듬뿍 집어넣은 또 다른 히어로 영화 <로케티어>를, 정확히 20년 전에 내놓지 않았던가.

더 나아가,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들>도 <로케티어>도 20세기 초반, 딱 <퍼스트 어벤저>의 극중 시대배경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연속활극(시리얼)에서 멋지게 써먹었던 것들에 또 빚을 지고 있고. 그렇게 보면 <퍼스트 어벤저>는 영롱히 빛나는 연속활극 역사의 일부분이기도, 동시에 그 연속활극에 대한 애정 어린 헌정이기도 하다. 게다가 <퍼스트 어벤저>의, 아까 언급했던 ‘홍보대사 시퀀스’에 캡틴이 출연한 연속활극 장면이 나오기도 했으니 – 당연히 흑백으로 – 이 얼마나 재미있는 양파껍질 벗기기 놀이인가! <퍼스트 어벤저>는 내가 그러한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그 영화들이 나에게 선사했던 즐거움과 흥분감을 고스란히 되살려 주었다. 비록 어떤 파격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이 영화의 왕도적이고 온건한 보수성에 호감을 갖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어벤저스>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워졌다.

원제: 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
감독: 조 존스튼
주연: 크리스 에반스, 헤일리 애트웰, 토미 리 존스, 휴고 위빙, 도미닉 쿠퍼
북미 개봉: 2011년 7월 22일
한국 개봉: 2011년 7월 28일

[X-멘: 퍼스트 클래스] (2011)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X-멘>과 그 속편 <X2>가 그토록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는 인간의 편견과 그것으로부터 가지를 친 차별과 소외,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틀에 요령 있게 녹여냄으로써, 대중영화/장르영화의 참신한 전범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싱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고통 받아야 했던 뮤턴트들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락은 물론 주제 의식도 탄탄하게 갖춘 수퍼히어로 영화를 빚어냈다. 내가 보기에 이들 두 편의 영화, 특히 제1편 <X-멘>은 수퍼히어로 영화 붐의 결정적인 촉발점이 된 <스파이더맨> 이전에 이미 21세기 수퍼히어로 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분명한 주제 의식, 현실의 물리법칙을 최대한 준수하면서도 수퍼히어로의 신화적 매력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은 세밀하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은 <X-멘>의 뒤를 이었던 수많은 수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불과 몇 편만이 제대로 이뤄냈을 뿐이다.

싱어는 이 프리퀄 <X-멘: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작자로 물러났고, 이번에는 <킥애스>로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뽐냈던 매튜 본이 감독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싱어가 <X-멘>과 <X2>에서 유지했던 핵심은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그 빛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로 시대 배경을 다소 느슨하게 제시했던 전편과는 달리 약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그린 <퍼스트 클래스>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 60년대 인권운동이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현대사와 X-멘의 결성이라는 수퍼히어로 세계의 신화를 과감히 연결한다. 이야기의 시공간은 더욱 구체적으로 설정되고, 전편에서 불거졌던 갈등의 원인과 숨겨졌던 이야기들이 밝혀지면서 X-멘의 영화 세계는 한층 더 복잡해지고 생동감을 띤다. <퍼스트 클래스>는 단순히 X-멘 영화 시리즈 여기저기에 뚫린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임무를 아주 훌륭히 수행하는 것은 물론, X-멘 영화 세계를 의미 있게 확장한다.

<퍼스트 클래스>의 연출이 완전무결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편보다 등장인물이 두세 배는 늘어났고 그 대부분은 뮤턴트다. 아마도 그들의 초능력을 하나씩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상영시간의 절반은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X-멘 결성이라는 중요한 플롯 포인트를 엮어야 하고, 제목이 뜻하는 바에 맞춰 뮤턴트들이 훈련할 시간도 필요하다. 프리퀄이니만큼 X교수, 매그니토, 미스틱 등 주요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발굴, 발전시키되 전편과 무리 없이 연결시켜야 하고, 조단역급 뮤턴트들도 다루어야 한다. 원작 및 전편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인용과 서비스도 군데군데 뿌려 두어야 한다(그 중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것들도 몇 가지 있다). 여름 블록버스터 전쟁 참전작이니 액션과 시각효과도 잘 짜 넣어야 한다. 장면이 매우 빠르게 바뀌어 가고, 그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와 새로운 초능력을 선보이거나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는 등 계속해서 못 보던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정보량이 아무튼 굉장히 많다. 집중해서 보아야 하고, 가능하면 두어 번 다시 보기를 권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구성상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퍼스트 클래스>는 기적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100%는 아니지만, 98% 이상이라고 할까. 단 한 장면도 낭비되지 않았고, 묘사는 간결하며 군살이 없다. 어쩌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 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거슬릴 만큼은 아니다. 보고 나면 이야기와 주제가 깔끔히 정리된다. 무엇보다도 <X-멘>과 <X2>의 유전자를 한 톨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계승하고 있어 그 매력과 향기를 한껏 느낄 수 있으니 기쁘다. 배우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등장인물을 살아 숨쉬도록 연기했지만, 특히 제임스 매커보이와 마이클 파스벤더는 뛰어나다. 케빈 베이컨도 제법 위협적인 악역을 잘 소화했다. 그야말로 발군의 만듦새. 전편의 완성도에 버금가는 것은 물론, <아이언 맨>이나 <스파이더맨> 1, 2편을 잇는 ‘최고의 마블 수퍼히어로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X-멘: 최후의 전쟁>과 <X-멘 탄생: 울버린>에 실망했던 팬이라면, <퍼스트 클래스>는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작품이다. 사실 이것은 보통 단비가 아니다. <퍼스트 클래스>는 멋진 X-멘 영화에 목말라 있었던 팬들을 촉촉하고 따뜻하게 적셔 주고, 그들의 가슴을 힘차게 뛰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바라 왔던 바로 그 X-멘 영화, 아니, 분명히 그 이상이다.

원제: X-Men: First Class
감독: 매튜 본
주연: 제임스 매커보이, 마이클 파스벤더, 제니퍼 로렌스, 케빈 베이컨, 니콜라스 홀트
북미 개봉: 2011년 6월 3일
한국 개봉: 2011년 6월 2일

[아이언 맨 2] (2010)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아이언 맨 2>(Iron Man 2)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토니 스타크가 자신이 아이언 맨임을 공언하면서 기자회견장을 패닉에 빠트리는 모습을 저 멀리 러시아에 있는 어떤 허름한 골방에서 다시 보게 된다. 이곳에서는 한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있고, 그의 아들은 슬픔을 이겨내고자 보드카를 연신 들이킨다. 마침내 노인이 죽고 아들의 슬픔은 분노로 변한다. 토니 스타크 / 아이언 맨의 새로운 적, 이반 반코 / 윕래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번 속편의 적은 윕래쉬 한 명만이 아니다.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스타크로부터 아이언 맨 수트를 압수하려 하고, 틈만 나면 그를 물어뜯으려는 라이벌 군수업자 저스틴 해머는 윕래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강력한 위협 세력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스타크의 회사는 경영실적이 악화되고 있고, 스타크 자신은 아이언 맨으로서 세계평화를 지킨다는 자아도취와 자연인 토니 스타크로서 수트 착용 후유증의 괴로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학적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다.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니 관객은 불안해진다. 이러다 <배트맨 & 로빈> 꼴이 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건 너무 심한 가정이고 최소한 <스파이더맨 3> 만큼은 해 줘야 할 텐데.

전편의 공식을 별다른 의미 없이 반복하거나 그마저도 제대로 못하고 쓰러지는 다른 속편들에 비하면, 다행히도 <아이언 맨 2>는 군계일학이다. 존 파브로 감독과 저스틴 서루 작가는 전편의 황금공식에 적절한, 때로는 과감한 변화를 주면서, 수퍼히어로 영화로서는 일반적인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호평을 받았던 <아이언 맨>의 속편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착실하게 해냈다. 우리는 스타크와 페퍼 포츠, 로디, 해피 등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이 망가지지 않은 채 유머와 호통을 주고받는 모습을 여전히 즐길 수 있다. 히어로가 ‘실존’하는 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존’과도 맞서 싸우며 결국 슬기롭게 극복하는 왕도 전개도 비교적 탄탄하다. 이 과정에서 조금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를 대비해 적절히 치고 들어오는 볼거리와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어벤저스> 떡밥이 도처에 마련되어 있다.

배우들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매력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활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조차 밉지 않다. 귀네스 팰트로우가 분한 페퍼 포츠와의 티격태격하는 궁합도 여전히 좋다. 그는 스타크 때문에 덜컥 CEO가 되다 보니 짜증이 좀 늘긴 했다. 배우 교체로 말이 많았던 로디는 돈 치들의 이미지 때문에 좀 뺀질거리고 경박한 느낌이 줄어든 대신, 모두가 기대했던 새로운 히어로 워 머신으로서 짊어져야 할 비중을 잘 받아냈다. 저스틴 해머는 좀 뻔한 악역이지만 샘 록웰의 노련미가 이를 충분히 상쇄했고, 윕래쉬는 미키 루크의 현재 이미지를 잘 살린 터프하고 카리스마 있는 악역이다. 등장인물과 에피소드가 늘어나 가장 큰 손해를 본 쪽은 블랙 위도우 역의 스칼렛 조핸슨이다. 배역과 그 비중이 얄팍해졌으니 배우 자신의 재능도 제대로 쓰여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새뮤얼 L. 잭슨의 닉 퓨리는 떡밥 투척자로서 제 역할을 다 했다. 액션과 물량공세는 어떨까. 전편의 키워드가 아이언 맨 수트라는 궁극의 장난감을 구경한다는 신기함과 초음속으로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 등이었다면, 이번 속편에서는 아무래도 처음의 설렘은 조금 덜한 대신 이미 탄탄하게 확립된 세계관에서 가능한 화려하고 다양한 변화를 한껏 만끽할 수 있다. 휴대용 수트 ‘마크 V’는 정말로 탐이 난다.

<아이언 맨 2>는 전편의 장점과 매력을 충실히 유지하면서 속편의 규모 증대로 인한 이야기의 파탄을 납득할 수 있는 선까지 최선을 다해 막아냈다. 중반의 늘어짐이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면 전편을 즐겼던 팬들도 실망하지 않을 만하다. 그리고, <어벤저스>에도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

원제: Iron Man 2
감독: 존 파브로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귀네스 팰트로우, 돈 치들, 미키 루크, 샘 록웰
북미 개봉: 2010년 5월 7일
한국 개봉: 2010년 4월 29일

[인크레더블 헐크] (2008)

(C) Universal Pictures, Marvel Enterprises
(C) Universal Pictures, Marvel Enterprises

마블은 전편에 해당하는 이안의 <헐크>에서 기대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불운한 영화는 지루하고 뭔가 뻥 하고 터져 주는 것이 부족하다는 혹평에 시달려야만 했다. 어떤 영화를 5년 만에 다시 만드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하지만, 마블 수퍼히어로 중에서도 헐크는 한 번의 실패로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캐릭터이고, 추진 중인 <어벤저스> 프로젝트도 있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되살려야만 했다. 그리하여 <인크레더블 헐크>(The Incredible Hulk)는 속편 아닌 속편이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편과의 거리두기에 몰두한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전개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지루할 법한 부분은 과감하게 골라내고, 남은 자리를 액션으로 채워넣는 것이다.

문제는 골라내기가 좀 지나쳤다는 점이다. 각본이 명확하게 방향을 잡지 못해 어느 부분에서 힘을 주어야 하는지 헛갈린다. 에드워드 노튼과 제작사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는 의혹이 공식적으로는 부인되었지만, 완성까지 겪었을 진통이 어느 정도 짐작되기는 한다. 그만큼 캐릭터를 공들여 묘사하지 못했기에 배너와 로스 부녀 사이의 갈등 구조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중요한 악역이 될 수도 있었던 블론스키는 단순한 싸움광에 머물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전개 상 여러 군데 맥이 끊기는 건 물론이며 때때로 동기를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눈에 띈다. 전편보다 유머도 늘어났지만 절반, 잘 봐줘서 3분의 1 정도는 먹히지 않는다.

영상 역시 지극히 평면적이다. 헐크는 좀 더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전편 이상으로 질감 표현이 훌륭한 대목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과의 편차가 의외로 크다. 만화의 페이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영상과 과감한 편집 기법을 도입한 전편이 그리워지는 이유가 뭘까. 시각적인 참신함 면에서 이 영화는 오히려 퇴보해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액션 장면은 괴력과 괴력이 격돌하는 느낌을 비교적 잘 살렸고, 템포도 매우 빨라 보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 없이 즐겁다. 클라이맥스에서 조금 더 강하게 나갔더라면 좋았겠지만, 이번에는 헐크의 영웅성도 좀 더 명확히 드러내야 하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억지로 자제한 듯한 느낌이다. 카메오는 <어벤저스> 프로젝트와 연관된 인물들도 있고, 예상 대로의 인물이 의외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결국 <인크레더블 헐크>는 2%도 아니고 20%쯤 부족한 영화이다. 전편의 실패를 만회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이해할 수 있고, 떡밥 영화로서의 사명감도 수긍할 수 있고, 속편답게 화끈한 대결을 보여주고자 작정한 의도도 좋았지만 이 모든 것이 헐크의 단단한 근육만큼 잘 뭉쳐지지는 못했다.

원제: The Incredible Hulk
감독: 루이 르테리에
주연: 에드워드 노튼, 리브 타일러, 윌리엄 허트, 팀 로스, 팀 블레이크 넬슨
북미 개봉: 2008년 6월 13일
한국 개봉: 2008년 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