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 (2010)

(C) Echo Lake Entertainment, A Bigger Boat
(C) Echo Lake Entertainment, A Bigger Boat

<병동>(The Ward)은 기억을 잃은 한 젊은 여성이 정신병원 병동에 수용되면서 시작된다. 크리스틴이라는 이 여성은 농가를 불태우다 경찰에 붙잡혔다. 병원 측은 그에게 얼마 전 의문의 죽음을 당한 환자의 방을 내어주는데, 그 죽음의 원인은 주위의 다른 환자들을 한 명씩 데려가면서 크리스틴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고립된 공간을 배경으로 공포스러운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는 내용,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위태롭게 자리한 등장인물과 같은 요소들이 존 카펜터 감독의 과거 대표작인 <13 경찰서 습격>이나 <괴물>, <매드니스> 등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주로 당대나 가까운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던 지금까지의 카펜터 영화와는 달리, <병동>의 시대 배경은 1960년대라는 점이다. 그리고 카펜터는 외부의 타자에 대한 공포를 다루는 장르 공식에 비교적 충실해 온 편인데, 이 영화에서는 정신병원이라는 밀폐 공간에 제정신인지 확신할 수 없는 주인공이 갇힌다. 주인공 자신이 타자이며 공포의 근원은 내부에 있다. 그리고 그 공포가 병동 안에서 자행되는 환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취급과 같은 현실 문제와 연계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렇게 <병동>은 ‘카펜터다움’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모습도 기대할 만한 영화로 다가왔다.

그러나 일부 시각적 설계와 장면 연출을 빼면 전체적인 구성이 매우 허술했다. 플롯 전개는 너무나도 예측하기 쉬웠고, 예전에 어디선가 본 장면들을 퍽 많이 재활용했다. 등장인물들의 간결한 묘사는 좋았지만(특히 에밀리 역으로 분한 메이미 거머가 인상적이었다) 그들 사이에,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이 거의 없었다. 제러드 해리스라는 훌륭한 배우조차 큰 역할일 수 있는 정신과의사로 분해서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1960년대라는 배경 역시 주인공의 탈출 시도를 보다 쉽게 하려는 장치이자, 황량하고 살풍경한 이미지를 위한 일종의 꼼수 설정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주인공의 탈출시도극과 그 이면에 놓인 주제의 암시 사이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둘 중 어느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클라이맥스는 그야말로 흐지부지이고, 마지막 장면은 나쁜 의미에서 뒤통수를 친다.

시각적인 면에서 <병동>은 볼 만한 구석이 적지 않다. 어두컴컴한 병동의 통로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카메라는 장소에 깃든 광기와 음산한 공포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담아내었다. 몇몇 쇼크 장면이나 유혈 장면에서는 컷을 직조하는 카펜터의 재능이 녹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L. A. 탈출>의 흥행 실패를 털고 일어나 청년기의 활력이 여전함을 보여주었던 <뱀파이어즈>와는 달리, <병동>은 카펜터가 너무 오랫동안 쉰 것은 아닐까, 그에게 이제 두둑한 배짱 같은 건 더 이상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 만큼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할로윈>으로 한때 자신의 시대를 만들었던 카펜터는 이제 후대의 영화들을 개성 없이 모방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지. 40년 가까이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써 왔던 그의 이력에서, <병동>은 정말로 오랜만에 만든 장편이라는 점 말고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운 영화였다. 그렇게 카펜터답지도 못했고, 그렇게 카펜터다움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어정쩡함. 고등학교 시절 <할로윈>을 본 뒤로 나에게는 늘 우상과도 같은 감독이었던 그가 10년 만에 내놓은 영화 <병동>을 보고 난 감상은 착잡하다.

원제: The Ward
감독: 존 카펜터
주연: 앰버 허드, 메이미 거머, 제러드 해리스, 대니엘 패너베이커, 로라 리
북미 개봉: 2011년 7월 8일
한국 개봉: 2013년 10월 16일

[둠즈데이] (2008)

(C) Rogue Pictures
(C) Rogue Pictures

<둠즈데이>(Doomsday)는 7, 80년대 SF/액션/판타지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이다. 닐 마셜 감독은 존 카펜터의 ‘탈출’ 시리즈와 <매드 맥스> 시리즈, <오메가 맨>, <엑스칼리버> 등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들로부터 줄거리는 물론 세계관과 인물 설정, 대사, 특정한 장면들, 미장센, 연출 스타일까지 몽땅 재료 삼아 <둠즈데이>라는 반죽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동일한 인물들이 계속 나올 뿐 어디선가 본 장면으로 가득하고, 장르는 20분마다 한 번씩 바뀐다. 어떤 컷이 SF라면 그 다음 컷에서 갑자기 중세 판타지가 시작된다는 식이다. 실은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성격, 외모, 입버릇도 예전 무슨무슨 영화에서 본 그대로이다. 얼핏 <둠즈데이>는 창의성과는 담을 쌓은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저 그런 짜깁기 영화로 넘겨버리기에는 이 영화의 매력이 만만찮다. 반죽이란 재료의 맛에 익숙한 사람에게 즐거움과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가 뒤섞이면서 내는 오묘하고 새로운 맛은 먹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문제는 누구나 그런 반죽을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뒤섞는다고 맛있는 반죽이 되는 건 아니니까. 다행히 닐 마셜은 재능 있고 훌륭한 요리사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재료의 맛과 반죽 만드는 일 자체를 즐기고 사랑한다.

<둠즈데이>에는 프레임 사이마다 옛 장르영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배어있다. 장면을 무턱대고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의 어떤 점을 골라내어 살려야 할지,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앞섰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모든 고민은 단 한 가지 목적을 향하고 있다. ‘나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에게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싶다’는 열망이다. 감독의 그러한 열망은 영화에 질려버릴 정도의 추진력을 부여했다.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렬한 액션과 유혈로 이루어진 <둠즈데이>의 톡 쏘는 맛에 심장이 격렬히 고동치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다. 닐 마셜이 안내하는 이 죽음의 고속 질주에는 틀림없이 동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원제: Doomsday
감독: 닐 마셜
주연: 로나 미트라, 밥 호스킨스, 맬컴 맥도웰, 알렉산더 시디그, 데이비드 오하라
영국 개봉: 2008년 5월 9일
한국 개봉: 2008년 6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