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트리니티] (2004)

(C) New Line Cinema
(C) New Line Cinema

<블레이드> 시리즈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능가하는 강력한 악역들이다. 1편의 프로스트는 스티븐 도프의 뺀질거리는 반항아적 이미지를 잘 살려낸 연기 덕에 무뚝뚝한 살인 기계에 가까웠던 블레이드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고, 선과 악(적어도 이 시리즈의 세계에서 흡혈귀는 영원한 악의 상징이다)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면서 클라이맥스의 검술 대결 시퀀스를 기억할 만한 대목으로 만들었다.

2편에 등장한 리퍼는 근래 들어 가장 흉악한 괴물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2000년대 최고의 무비 몬스터 가운데 하나로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문자 그대로 악마의 아가리 그 자체인 끔찍한 모양으로 갈라지는 턱, 햇빛 이외에는 절대로 죽일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은 물론, 인간과 흡혈귀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강렬한 캐릭터는 ‘사신(死神)’이라는 이름값을 해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블레이드> 시리즈는 주인공 블레이드가 악을 처단하는 과정이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의 싸움에 끝이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불길하고 암울한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블레이드가 있으니 문제 없어!’라는 명제가 개입되는 순간, 지금까지 지탱해왔던 시리즈의 매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리즈의 완결편인 <블레이드: 트리니티>는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주인공을 바라본다. 뉴 라인 시네마의 로고가 사라지자마자, 우리는 한니발 킹의 확 깨는 내레이션을 듣게 된다. 내용 자체는 1편에서 블레이드가 했던 대사와 그리 다르지 않지만 킹의 쾌활한 말투는 영화의 방향을 시작부터 틀어 놓기에 충분했다. 뒤이은 첫 시퀀스는 관객의 흥미를 돋구기는커녕, 이미 작품 전체에 퍼지기 시작한 싸구려 액션 바이러스 때문에 대충대충 기워 놓은 수준에 머문다.

<블레이드 : 트리니티>는 견딜 수 없는 싸구려 투성이다. 최강의 적이라는 뱀파이어의 시조 드레이크는 오직 떡대만 들이밀고 있으며, 새로 등장한 아군 한니발 킹은 f자로 시작되는 욕설로 대사를 채우기에 급급하다. 이미 2편에서 바보 캐릭터로 전락해버린 위슬러는 어이없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세계는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설정으로 밀어붙인 조잡한 시퀀스들은 1편의 흡혈귀 회의 장면 하나 만큼의 정서적 울림도 주지 못한다.

유일하게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캐릭터는 블레이드 뿐. 그저 3편 내내 말없이 흡혈귀들을 찢어발겨 왔기에 그리 보일 따름이다. 그나마 위슬러의 숨겨진 딸이라는 애비게일이 불어넣은 신선한 활력이 아니었다면 영화를 끝까지 보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팟에 채워 넣은 mp3를 들으면서 흡혈귀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호쾌한 모습은 블레이드를 처음 보던 순간을 연상시키는 멋진 이미지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로서는 원래부터 얄팍했던 데이비드 S. 고이어의 각본을 그 자신이 직접 연출하다 보니 똑같이 얄팍한 영화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1, 2편의 각본도 그저 그랬긴 마찬가지지만, 영상을 능숙하게 다루는 감독들이 보기 좋은 결과물을 냈음을 상기한다면 이 가설이 뜬금없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정말로 좋아하는 연작물이 망가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모든 팬들이 두려워하는 바일 터. 아아, 블레이드. 어쩌다가 그렇게 싸구려가 되어버렸나요?

원제: Blade: Trinity
감독: 데이비드 S. 고이어
주연: 웨슬리 스나입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제시카 빌, 라이언 레이놀즈, 파커 포시
북미 개봉: 2004년 12월 8일
한국 개봉: 2004년 12월 15일

[수퍼맨 리턴즈] (2006)

(C) Warner Bros. Pictures
(C) Warner Bros. Pictures

두서없이 떠오르는 여러 가지 감상들.

– 오프닝 크레딧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존 윌리엄스의 그 메인 타이틀 음악, 푸른 빛의 궤적을 남기며 우주를 날아다니는 그 크레딧 자막까지 똑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지구를 배경으로 날아가는 수퍼맨도 크리스토퍼 리브가 브랜든 라우스로 바뀌었을 뿐, 그 구도 그대로 재현했다. 게다가 엔드 크레딧에 리브와 부인에게 바치는 헌사까지. <수퍼맨 리턴즈>는 리처드 도너의 1978년작 <수퍼맨>을 영상과 주요 설정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가 클 것이다.

– 새로운 수퍼맨 브랜든 라우스는 조금 딱딱하다. 그렇지만 모범적인 수퍼히어로 역에는 오히려 잘 어울린다. 격렬한 감정이 필요한 장면까지 딱딱한 것이 다른 영화에서라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수퍼맨이기 때문에 용인할 만하다.

–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점은 ‘수퍼맨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이 변했다.’ 이다. 지금까지 수퍼맨은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모범생 캐릭터라 친근감이 떨어지고, 변화 가능성이 적으며 재미가 없다는 지적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러한 세평을 의식한 듯 <수퍼맨 리턴즈>에는 크립톤 행성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온 수퍼맨이 느끼는 망향의 감정, 로이스 레인의 결혼과 출산에 의한 실연이라는 설정이 도입되었다. 이것은 수퍼맨의 초인적인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강력한 감정적 장애물로서, 그가 이에 반응하여 갈등을 겪다가 해결책을 찾아 가는 과정은 영화에서 가장 지루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이다. 수퍼맨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로이스의 주위를 계속 겉돈다. 단지 약속이 있다며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로이스가 담배를 피우러 옥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투시력으로 쫓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수퍼맨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른 안경과 수트를 벗고 옥상으로 날아가, 로이스에게 인터뷰 신청을 하고 함께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다. 약간은 진부하지만 방법은 맞았고, 결과적으로 보는 이도 동화된다. 마침내 수퍼맨은 새로운 고향인 지구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게 된다.

– 액션 시퀀스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실사와 CG와의 구별을 거의 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게 만들어졌으며 압도적인 박진감을 담아냈다. 셋 다 1978년작을 기초로 업데이트한 것들이라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다. 예를 들어 <수퍼맨>에서는 로이스 레인을 헬리콥터에서 구조했다면 <리턴즈>에서는 비행기에서 구조한다는 식이다. 상황 종료 후 ‘그래도 비행은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랍니다’ 라고 말하는 것까지. 하지만 총탄이 수퍼맨의 안구에 맞고 튕겨나가는 컷처럼 그때보다는 지금 더 어색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이 삽입됨으로써 데자뷔를 상당히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한다.

– 오히려 <수퍼맨 리턴즈>에서 가장 밋밋한 건 렉스 루터의 음모다. 물론 케빈 스페이시의 루터는 예상대로 훌륭했다. 스페이시는 진 해크먼보다 덜 우스꽝스럽지만, 그보다 훨씬 더 뻔뻔하고 사악하다. 사이드킥인 파커 포시도 의외로 재미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루터는 1978년작과 똑같은 수법으로 위기감을 조성한다. 30년 전에 비해 별다른 발전이 없는 것이다.

– 구름을 뚫고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수퍼맨. 로이스를 안고 메트로폴리스의 마천루 사이를 조용히 비행하는 수퍼맨. <수퍼맨 리턴즈>는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영상으로 이루어진 수퍼히어로 영화일 것이다.

– 팬들을 즐겁게 할 다양한 인용과 변주도 (당연히) 잔뜩 들어 있다.

– <수퍼맨 리턴즈>는 캐릭터나 설정의 근간을 뒤흔들어 완전히 다른 방향을 모색한 작품이 아니다. 영화적으로는 1978년작 <수퍼맨>을 2006년의 상황에 맞춰 새로이 만든 작품으로 봄이 타당하다. 기본에 충실하고 원전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으로 가득하다. 시각효과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지만, 스토리텔링은 시대착오적이 아닐까 할 만큼 눈높이다. 그럼에도 진부하지 않고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한다. 브라이언 싱어는 <X-멘>을 만들 때 그랬듯이, <수퍼맨 리턴즈>를 가장 수퍼맨다운 이야기로 만듦으로써 또 한 편의 걸작 수퍼 히어로 영화로 승화시켰다.

원제: Superman Returns
감독: 브라이언 싱어
주연: 브랜든 라우스, 케이트 보스워스, 케빈 스페이시, 제임스 마스든, 프랭크 랜젤라
북미 개봉: 2006년 6월 28일
한국 개봉: 2006년 6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