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 위대한 고릴라 제왕의 연대기

※ 읽기 전에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 국내 개봉을 맞아 영화 주간지 [씨네 21] 532호(2005년 12월 13일자)에 기획 기사 형식으로 기고한 글이다.

모든 킹콩 영화의 원조가 된 1933년판 <킹콩>부터 그 아류작까지 70여 년에 이르는 역사를 작품 중심으로 정리했고, 기획 단계에서 좌절된 미완성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도 간략하게 실었다. 10년 전에 쓴 글이므로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에 유의하시라.

이 글의 저작권은 나와 [씨네 21]이 갖고 있으므로 무단 인용이나 게재는 허락하지 않는다.

(C) Universal Pictures
(C) Universal Pictures

12월 14일, 피터 잭슨 감독의 신작 <킹콩>이 한국의 극장가를 찾는다. 잭슨이 어린 시절 오리지널 작품을 본 뒤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처럼 <킹콩>은 1933년 세상에 나온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고, 그들 가운데 영화라는 길을 걷게 된 사람들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다. 아울러 70여 년에 이르는 킹콩의 기나긴 역사는 다양한 속편과 관련작, 아류작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그 자체가 시각효과와 장르영화의 발전사와도 일맥상통한다. 2005년 새롭게 탄생한 <킹콩>을 보러 가기 전에 이 거대한 고릴라가 만들어 온 연대기를 한 번 되짚어 보는 것은 한층 흥미로운 관람을 위한 좋은 준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혹시 아는가. 오늘 옆 자리에서 같이 영화를 본 그 사람이 훗날 유명한 감독이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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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King Kong (1933)
감독 : 메리언 C. 쿠퍼, 어니스트 B. 쇼드색
출연 : 페이 레이, 로버트 암스트롱, 브루스 캐봇
흑백 / 100분

(C) RKO Radio Pictures
(C) RKO Radio Pictures

<킹콩>은 탐험가 기질을 타고난 제작자 겸 감독 메리언 C. 쿠퍼가 창조한 작품이다. 일찍이 거친 탐험과 야생동물(특히 고릴라)에 깊은 흥미를 가졌던 그는 대공황의 절정에 직면해 있던 1930년대 초의 대중을 현실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도피시켜 줄 오락 영화의 결정판을 만들고자 했다. 동료인 어니스트 B. 쇼드색과 함께 세계 각국 오지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유명해진 쿠퍼는 <킹콩>에서 자신을 매료시켰던 모든 요소들을 펼쳐 보인다. 해골섬으로 대표되는 미지의 땅으로의 모험담, 야수 콩이 상징하는 자연과 칼 데넘이 상징하는 문명과의 대립각, 콩과 금발의 미녀 앤 대로우가 연출하는 고전적인 미녀와 야수 플롯… 이 모든 것을 영상에 담아낸 작품은 당시로서는 거의 전례가 없었다.

또한 시각효과의 역사에 있어 <킹콩>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다. <킹콩>이야말로 시각효과가 스토리를 이끌어간 거의 최초의 영화이자, 동시에 그것이 가장 완전한 형태로 구현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앤 대로우도 킹콩 자신도 아닌, 털가죽과 점토로 뒤덮인 철골 인형을 영상 속에서 날뛰는 거대 고릴라로 재탄생시킨 시각효과인 것이다. 이는 1925년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을 각색한 <잃어버린 세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솜씨. 그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과 배면 투사, 매트 페인팅 등 당시에 가능했던 모든 기술효과를 총동원해 만들어 낸 <킹콩>의 환상적인 영상은 투박한 흑백 화면을 벗어나 관객의 상상력과 경외감을 자극하는 놀라운 박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킹콩과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벌이는 격투 장면, 긴장감과 공포가 생생한 외나무다리 시퀀스, 성이 나 원주민 마을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콩의 묘사 그리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의 장렬한 라스트 등은 그 하나하나가 고전이 되어 수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에서 인용 및 재생산되었다.

<킹콩>은 거대 괴수 영화의 시조로서도 가치가 높다. 공룡을 포함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거대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는 물론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킹콩은 그들과는 차별된 독자적인 캐릭터를 가졌으며 괴수 캐릭터가 영화를 대표하는 역할을 처음으로 완수함으로써 이후 레이 해리하우젠의 창조물들이나 일본의 고지라와 가메라 등으로 대표되는 거대 괴수 장르의 맹아가 된다. 약 2년여의 제작 기간을 거쳐 1933년 3월 2일 공개된 <킹콩>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작품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1991년에는 미국 국회 도서관의 영구 보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98년에는 미국 영화 연구소가 뽑은 역대 최고의 미국 영화 100편에 선정되기도 하는 등, <킹콩>은 7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 시절을 풍미한 영화로부터 시각효과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고전이자, 거대 괴수 영화의 출발점을 거쳐 당당한 문화적 아이콘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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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의 아들> Son of Kong (1933)
감독 : 어니스트 B. 쇼드색
출연 : 로버트 암스트롱, 헬렌 맥, 프랭크 라이커
흑백 / 70분

(C) RKO Radio Pictures
(C) RKO Radio Pictures

<킹콩>의 대성공 직후, RKO는 쿠퍼에게 ‘연말 시즌을 목표로 가능한 한 빨리 속편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쿠퍼 역시 킹콩의 유명세가 식으면서 아류작이 난립하기 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8개월 만에 신속히 만든 속편이 바로 <콩의 아들>이다. 칼 데넘 일행이 보물을 찾기 위해 해골 섬에 돌아가 킹콩의 아들 키코와 만나게 된다는 내용을 다룬 이 속편은 흥행에도 성공했고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스톱 모션 시각 효과도 여전히 훌륭했다.

그러나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전편과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진 것으로 평가 받았다. 그 이유로는 위화감이 들 정도로 강조된 코미디와 연결이 엉성하고 부자연스러운 스토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무자비한 야성의 상징이었던 킹콩과는 달리 키코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온순하고 충성스러운 고릴라인데, 애교 있고 귀엽기는 하지만 전편에서 압도적인 박력을 내뿜었던 아버지만은 못했다. 킹콩을 이용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인 데넘이 또 다시 자신의 이윤을 위해 섬에 돌아온다는 설정과 결말에서 키코가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내용도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같은 퀄리티 저하는 속편을 거의 동시에 기획하여 전편 이상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 현재와는 달리 촉박한 스케줄과 절반으로 깎인 예산이라는 당시의 제작 환경에 기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작품 내외적 한계 때문에 <콩의 아들>은 킹콩의 정사(正史)에 틀림없이 속함에도,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비운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 같은 시행착오는 반세기 뒤 데 라우렌티스판 리메이크의 속편인 <킹콩 2>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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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티 조 영> Mighty Joe Young (1949)
감독 : 어니스트 B. 쇼드색
출연 : 테리 무어, 벤 존슨, 로버트 암스트롱
흑백 / 94분

<마이티 조 영> Mighty Joe Young (1998)
감독 : 론 언더우드
출연 : 빌 팩스턴, 샬리즈 테론, 레이드 세베드지야
컬러 / 114분

(C) Argosy Pictures
(C) Argosy Pictures

<마이티 조 영>은 <킹콩> 시리즈가 아니지만 메리언 C. 쿠퍼(제작), 어니스트 B. 쇼드색(감독), 윌리스 오브라이언(시각효과) 등 <킹콩>을 만들었던 여러 재능들이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아울러 야성과 문명이 충돌한다는 주제 역시 <킹콩>의 변주에 해당하기 때문에 항상 함께 언급되곤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아프리카에서 ‘조셉 영’이라는 이름의 고릴라와 함께 자란 소녀 질(테리 무어 분). 이 영화에서 그들은 칼 데넘처럼 탐욕스러운 흥행사 맥스 오하라(다름 아닌 데넘 역의 로버트 암스트롱이 연기했다)에게 발탁되어 헐리우드의 호화 나이트클럽에서 서커스를 공연하지만 결국 탈출하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킹콩>과 다른 점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해피 엔딩.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가 뛰어나며 무엇보다도 훨씬 발전된 시각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눈에 띄는 부분은 실사 캐릭터와 스톱 모션 캐릭터가 동작을 주고받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 아프리카에서 카우보이들이 벌이는 조의 포획 작전, 조가 10명의 장사와 줄다리기를 벌이는 장면 등에서 이러한 효과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사람이 손수 모델의 자세를 바꿔야 하는 스톱 모션의 특성 상 프레임마다 털의 모양이 달라졌던 <킹콩>과는 달리, <마이티 조 영>의 조는 표면에 고무를 입히는 등의 개선이 이루어졌고 털의 재질감도 훨씬 리얼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오브라이언의 거듭된 실험의 결과로 한층 동작 묘사가 부드러워진 스톱 모션도 영상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 영화는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조수로 참여하여 약 80%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소화해 낸 레이 해리하우젠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도 스톱 모션의 역사에 있어 의미가 깊다.

1998년에 제작된 리메이크는 배경을 현대로 옮겼고 동물 보호론자로 설정이 바뀐 질이 조와 함께 밀렵꾼들의 위협에 맞서는 내용을 그렸다. <불가사리>로 시각효과 영화를 체험했던 론 언더우드 감독이 안정된 연출력을 선보였으며, 1976년판 <킹콩>과 <그레이스토크 타잔> <정글 속의 고릴라> 등을 통해 1급 특수분장 전문가로 인정받은 릭 베이커가 수트메이션과 모델을 담당했다. 여기에 적절히 사용된 CG가 조화된 영상은 유인원 시각효과의 한 정점을 기록한 것으로 평가 받았다. 테리 무어와 해리하우젠이 남녀 주인공을 보며 ‘처음 만났을 때의 당신 모습이라오’ 라고 말하는 카메오 장면도 인상 깊다.

(C) RKO Pictures, Walt Disney Pictures
(C) RKO Pictures, Walt Disney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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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대 고지라> キングコング対ゴジラ (1962)
감독 : 혼다 이시로
출연 : 타카시마 타다오, 사하라 켄지, 아리시마 이치로
컬러 / 98분

(C) Toho Co., Ltd.
(C) Toho Co., Ltd.

거대 괴수의 제왕 킹콩과 일본을 대표하는 괴수 고지라의 대결을 그려 큰 화제를 모았던 오락대작. 일본에서만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 고지라 시리즈 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을 세웠으며 세계적으로도 고지라 시리즈의 대표작으로서 높은 지명도를 가진 작품이다. 시각효과 면에서는 오리지널 <킹콩>의 스톱 모션 대신 일본 특유의 수트메이션(배우가 괴수 옷을 입고 연기하는 기법)과 미니어처 특촬을 활용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러나 못생긴 얼굴로 대표되는 킹콩 수트의 조악한 조형과 극중 킹콩이 고압전선을 씹어 대전체질로 변한다는 묘사, 신장 50m의 고지라에 맞추기 위해 터무니없이 거대화된 킹콩의 설정 등은 골수 킹콩 팬들로부터 혹평을 받기도 했다.

킹콩의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영화의 기원은 다름 아닌 윌리스 오브라이언. 슬럼프에 빠져 있던 그가 재기를 준비하면서 기획했던 작품은 킹콩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증손자가 만든 합성괴수 깅코와 대결을 벌인다는 내용의 <킹콩 대 프로메테우스>였다. 오브라이언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프로듀서 존 벡과 함께 제작을 추진했으나, 우여곡절을 거쳐 오브라이언은 배제된 채 작품의 아이디어만 일본의 토호 영화사까지 흘러가게 된 것. 결국 고지라 시리즈 3번째 작품으로 발표된 <킹콩 대 고지라>는 오브라이언의 의도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작품이 되었고, 죽기 얼마 전에야 자신의 아이디어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갔음을 뒤늦게 알게 된 오브라이언의 상심은 대단히 컸다고 전해진다.

인간 드라마 부분에서는 괴수 대결 영화와 함께 당시 일본에서 고도성장기의 애환을 그려 인기를 모았던 셀러리맨 영화의 플롯을 차용한 것이 특징이다. 캐릭터 묘사에 능한 혼다 이시로 감독의 연출과 세키자와 신이치 작가의 각본에 의해 두 장르가 자연스럽게 결합된 수작으로 인정받았다. 츠부라야 에이지가 담당한 킹콩과 고지라의 코믹하면서도 박력 넘치는 대결 장면도 훌륭한 볼거리인 <킹콩 대 고지라>는 나름대로 현지화에 성공한 킹콩 영화의 방계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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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쇼> The King Kong Show (1966)
제작 : 아서 랜킨 주니어, 줄스 배스
출연 : 빌리 메이 리처즈, 칼 배너즈, 수전 콘웨이
컬러 / 전 26화(편당 각 6분)

(C) Rankin/Bass Productions, Videocraft International
(C) Rankin/Bass Productions, Videocraft International

미국 ABC 채널을 통해 방영된 애니메이션 시리즈. 몬도 섬에서 연구 활동 중인 과학자 본드 교수 가족이 킹콩과 함께 다양한 모험을 체험한다는 내용으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모았으며, 한 번만 들어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쉬운 멜로디의 주제가가 인상적이다. 일본의 토에이 동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기준에서는 다소 어설프고 조악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한 스토리와 친근감 있는 캐릭터들은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본령에 충실하다. 제작자 랜킨과 배스의 대표작으로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단골로 방영되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루돌프 사슴코>(1964)가 있는데, 이 작품은 2030세대들이라면 TV로 한 번씩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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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의 역습> キングコングの逆襲 (1967)
감독 : 혼다 이시로
출연 : 타카라다 아키라, 로즈 리즌, 아마모토 히데요
컬러 / 104분

(C) Toho Co., Ltd.
(C) Toho Co., Ltd.

토호 창립 35주년 기념작. 킹콩의 새로운 실사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킹콩 쇼>의 랜킨-배스 프로덕션과 <킹콩 대 고지라>의 대성공으로 고무된 토호의 의향이 접점을 이룬 작품이다. 원래 토호는 킹콩과 괴수 에비라가 대결한다는 내용의 <로빈슨 크루소 작전 킹콩 대 에비라>라는 각본을 제출했으나 기각되었고, <킹콩 쇼>의 캐릭터와 설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각본이 채택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킹콩의 역습>이다. 본드 가족 대신 UN의 다국적 연구원들이 주인공이며, <킹콩 쇼>에 나왔던 악당 닥터 후와 그가 만든 로봇 고릴라인 메카니콩도 실사로 등장한다. <킹콩 대 고지라>와 마찬가지로 수트메이션과 미니어처 특촬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영화 초반부 킹콩과 T-렉스형 괴수 고로사우루스가 싸움을 벌이는 시퀀스는 특촬감독 츠부라야 에이지가 오리지널 킹콩에 대한 존경을 표한 명장면이다.

이외에도 정교한 실사와 모델의 합성, 킹콩의 강력한 힘을 중량감 있는 영상에 담은 촬영 기법 등 전반적인 특촬의 질은 <킹콩 대 고지라>에 비해 훨씬 발전되어 있다. 닥터 후로 분한 성격 배우 아마모토 히데요, 마담 피라냐 역의 하마 미에(007 <두 번 산다>의 본드 걸) 등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도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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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King Kong (1976)
감독 : 존 길러민
출연 : 제프 브리지스, 제시카 랭, 찰스 그로딘
컬러 / 134분

<킹콩 2> King Kong Lives (1986)
감독 : 존 길러민
출연 : 린다 해밀턴, 브라이언 커윈, 존 애쉬튼
컬러 / 105분

(C) Dino De Laurentiis Company
(C) Dino De Laurentiis Company

<킹콩>의 대규모 리메이크 계획은 1976년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으나, <포세이돈 어드벤처>나 <타워링> 등 재난영화가 한 때의 붐을 이뤘던 당시야말로 뉴욕에 나타난 거대한 고릴라의 난동을 다시 한 번 연출할 가장 적합한 시기였을 것이다. 여기에 두둑한 배짱이라면 메리언 C. 쿠퍼에 지지 않을 명 프로듀서 디노 데 라우렌티스가 나서면서 결국 1933년작 이후 첫 공식 리메이크인 1976년판 <킹콩>이 태어나게 된다.

미국에서는 파라마운트가 배급했던 이 리메이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화화 판권을 사이에 둔 유니버설과의 혈투로 이미 상당한 이목을 끌었으며, 실물 크기의 ‘로봇 킹콩’이 등장한다는 홍보는 그 이상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대부분의 리메이크가 그렇듯 오리지널에 비해 신선함과 박진감이 떨어진다는 점은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밋밋하게 늘어난 스토리에 2시간 14분이라는 상영시간은 너무 길었고, 시각효과는 오리지널보다 존재감이 훨씬 뚜렷했지만 그만큼 영상 표현의 자유도가 제한되었다. 실제 로봇 대신 릭 베이커가 고릴라 수트를 입고 연기한 장면이 더 많이 나온다는 부분은 특히 혹평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기계 장치를 통해 연출된 킹콩의 다양하고 리얼한 표정들과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인조 킹콩 팔의 완성도는 이 영화와 함께 쏟아졌던 숱한 아류작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뛰어났다. ‘내게 있어 오리지널 <킹콩>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라는 존 길러민 감독의 말처럼 킹콩에 대한 재해석도 돋보이는데, 오리지널에서의 잔인무도한 야성 그 자체였던 킹콩이 보다 감정에 민감한 동물로 묘사된 부분은 이 작품만이 가진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배리의 서정적인 음악과 리처드 클라인의 촬영 등 당시나 지금이나 일급이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즐길 거리도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오리지널인 1933년판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통해 킹콩의 이미지가 각인된 팬들이 많다.

한편 <킹콩>의 속편인 <킹콩 2>에서는 전편에서 죽었다고 여겨졌던 킹콩이 10년 후 심장 이식 수술을 통해 부활한다. 여기에는 1982년 첫 개발에 성공한 인공심장이라는 과학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암컷 고릴라 ‘레이디 콩’이 등장하고 킹콩과 레이디 콩의 로맨스(!)를 도입한 방식은 1933년 당시 <킹콩>과 <콩의 아들>과의 관계를 연상시키고, 마지막 장면에서 두 고릴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그렇다. 시각효과 기법은 전편에서 사용된 방식을 대부분 재활용하고 있으나, 형편없이 깎인 예산 때문에 수트와 미니어처의 질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10년 전의 감각 그대로 작품을 이끌어 간 존 길러민 감독의 연출은 엉성한 각본과 함께 부작용을 일으켜 결국 전편만큼의 중량감도, 시각적 쾌감도 이끌어내지 못한 결과물이 되고 말았다. 많은 킹콩 팬들에게 죄의식을 동반한 즐거움으로 기억된다.

(C) De Laurentiis Entertainment Group
(C) De Laurentiis Entertainment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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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의 대역습> A*P*E (1976)
감독 : 폴 레더
출연 : 로드 애런츠, 조애나 컨스, 이낙훈
컬러 / 87분

(C) Lee Ming Film Co., 국제영화흥업주식회사
(C) Lee Ming Film Co., 국제영화흥업주식회사

<킹콩>의 아류작들 가운데 거의 최하급 퀄리티를 자랑하는 문제작(?). 제목부터 데 라우렌티스의 <킹콩> 리메이크로 조성된 ‘킹콩 붐’에 편승하려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미 합작으로 제작되어 이낙훈, 우연정, 조춘 등의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것은 물론, 대부분의 장면이 한국에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근근이 이어져 온 한국 괴수영화의 계보에도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하나, 아쉽게도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논하기조차 어려운 수준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스톱 모션을 활용하는 대신 배우가 괴수 수트를 입는 수트메이션 기법을 채택했는데, 조악하기 짝이 없는 수트는 관객들이 고릴라로 감정이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으며, 상어 시체를 물에 헹구는 것을 대결 장면이라고 찍어놓은 꼴이나 카메라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는 고릴라의 황당한 모습 등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3-D 입체 영화로 제작되어 카메라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병사의 커트와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Z급 영화만을 즐기는 팬들이라면 환호성을 지를 만한 요소들로 가득하지만, 평범한 관객들까지 굳이 찾아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중에게 ‘킹콩은 유치한 괴수 영화’라는 왜곡된 인식을 심어준 데는 이런 터무니없는 영화들의 잘못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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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콩> Queen Kong (1976)
감독 : 프랭크 애그러머
출연 : 로빈 애스크윗, 룰라 랜스카, 밸러리 리온
컬러 / 87분

(C) Cine-Art München, Dexter Film London
(C) Cine-Art München, Dexter Film London

제목 그대로 ‘<킹콩>의 여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주요 캐릭터의 성을 오리지널과 정반대로 바꿔버린 것이 특징이다. 유방이 달린 암컷 거대 고릴라가 남성 캐릭터를 납치하며, 그 남성 캐릭터는 여성 감독의 구애를 뿌리치고 갖은 고생 끝에 고릴라와 행복하게 잘 산다는 줄거리. 이 쯤 되면 여성 버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패러디에 가까운 수준인데, 여기에 실로 조잡하기 짝이 없는 뮤지컬 장면이 이따금씩 삽입되어 황당함은 점차 더해간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의 설득으로 런던 시내(그렇다, 이번에는 고릴라가 빅 벤에 매달린다!)의 모든 여성들이 ‘여성 해방’ 등의 푯말을 들고 고릴라를 응원하는 것으로 끝난다.

액션보다는 코미디와 개그에 치중하는 등 ‘한 번 놀아 보자’는 제작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예산도 아니고 ‘무예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조악한 영상과 허술한 연기, 뮤지컬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최악의 노래 등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끝까지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작품을 심히 불쾌하게 여겼던 디노 데 라우렌티스는 법원 명령을 통해 개봉을 막았으며 2001년이 되어서야 해금, 일본에서 최초로 극장 공개되었다. 미국에서는 2003년에 DVD로 곧장 출시되었다. 킹콩의 야사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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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성왕> 猩猩王 (1977)
감독 : 하몽화
출연 : 에벌린 크래프트, 이수현, 곡봉
컬러 / 87분

(C) Shaw Brothers
(C) Shaw Brothers

홍콩 쇼 브라더스 최초의 본격 괴수 영화. 역시 70년대 ‘킹콩 붐’에 영향 받은 작품이기는 하나 다른 아류작들과는 달리 거대 ‘고릴라’가 아닌 거대 ‘북경원인’이 등장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인도 로케를 통해 현지의 이국적인 풍물과 코끼리, 호랑이, 코브라 등 맹수들의 활약을 화면에 담았으며 한국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배우인 이수현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등 여타의 킹콩 관련작들과는 확실히 차별되는 분위기다.

특촬은 츠부라야 에이지로부터 사사받은 아리카와 사다마사가 담당하였으며 훗날 헤이세이 고지라 시리즈의 특촬감독이 된 카와키타 코이치 등 일본 특촬계의 중진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홍콩영화의 특징적인 빠른 장면 전환과 과장된 상황 연출, 의외의 잔혹한 유혈 묘사 등으로 인해 컬트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극중 북경원인의 친구인 야생의 미소녀 에벌린 크래프트의 요염한 자태는 관객은 물론 촬영 스탭들까지도 침 흘리게 했다는 후문. 200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국내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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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 불발된 프로젝트들

워낙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답게 ‘킹콩’이라는 이름을 달고 영화계를 떠돌았던 미완성 프로젝트들도 수없이 많았다. 킹콩의 아버지인 쿠퍼와 쇼드색조차 <콩의 아들>의 속편 <킹콩의 새로운 모험>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1편의 시점에서 데넘 일행이 킹콩을 뉴욕으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룰 예정이었다. 쿠퍼는 자신이 개발한 시네라마 기술을 활용한 킹콩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킹콩의 명성을 함부로 망치지 못하도록 ‘노 리메이크’ 선언을 했다. 이 때문에 1973년 그가 죽기 전까지 많은 기획안들이 무산되었다. 영국 공포영화의 명가 해머에서는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등 유니버설 몬스터의 리메이크에 이은 <킹콩>의 리메이크를 제안했고, 1970년대 초 스톱 모션 애니메이터 짐 댄포스는 당시 퍼블릭 도메인이었던 <킹콩> 소설판의 영화화를 추진했으나 RKO의 이의 제기로 무산되었다. B급영화의 대부로 잘 알려진 로저 코먼도 1976년작 리메이크의 판권을 둘러싼 북새통을 틈타 한몫 챙기려 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토호가 <킹콩 대 고지라>의 리메이크를 검토하기도 했다. 리메이크의 배턴이 피터 잭슨에게 넘어가기 전 거론된 감독으로는 존 랜디스 등이 있다.

[고지라] 3회차 감상

앞선 글
2014/05/14 – [감상] – [고지라] (2014)
2014/05/15 – [감상] – [고지라] 2회차 감상

(C) Warner Bros. Pictures / Legendary Pictures / Toho Co., Ltd.
(C) Warner Bros. Pictures / Legendary Pictures / Toho Co., Ltd.

앞선 두 번은 아이맥스 3D로 보았으나, 이번에는 소규모 상영관에서 2D로 감상했다. 스크린이 더 작고 화면 비율도 다르다 보니 고지라의 거대감이 아무래도 좀 덜했고, 근사한 파노라마 샷도 몇 걸음 떨어진 채 억지로 눈의 초점을 맞춰 그림 속 세부를 확인하려 애쓰는 듯한 기분으로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맥스 스크린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고, 나중에 TV로 볼 땐 이것마저도 그리워질 게 틀림없다. 어두운 장면에서 화면이 좀 침침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영관 별로 편차가 있지 않나 싶다.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3D의 입체감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라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상영 방식은 아이맥스 2D라고 생각한다.

처음 볼 때도 그랬지만, 오프닝 크레딧(여는 영상)은 다시 보아도 1998년판 <고질라>를 떠올리게 한다. 핵실험 과정이 포함된 오래된 자료 영상을 편집한 모양새를 냈다는 점, 장중한 관현악 연주곡이 어우러진다는 점, 본편에 미처 그려질 여유가 없었던 프롤로그를 대신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개렛 에드워즈 감독은 이 내놓은 자식까지 포용하려 했을까? 여하튼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멋진 테마와 함께 단번에 시선을 끄는 인상적인 크레딧이다. 만든 사람은 저 유명한 카일 쿠퍼. 2004년 <고지라: 파이널 워즈>에 이어 두 번째로 고지라 영화에 참여하였다.

초반에 신경 써서 확인하려 했던 대목은 ‘모스라’에 대한 인용이다. 시사회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수조 안에 있는 고치를 꼼꼼하게 보여 주길래 속으로 ‘모스라?’ 라고 잠깐 생각하고 말았고, 첫 감상이라 밀려드는 갖가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렇지만 시사회 후 함께 본 빅 몬스터 운영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스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길래,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떡밥이 있나 보다.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봐야지.’ 라고 다짐했었다.

이번 3회차 감상에서 확인한 모스라 관련 인용은 일단 두 가지.

1. 교실 장면에서 대피를 지시하는 교사의 오른쪽 뒤로, 나방(또는 나비)의 생태를 담은 걸그림이 보이는데 그 나방(또는 나비)이 모스라의 모습 그대로이다. 걸그림의 한자가 ‘나방 아(蛾)’인지 ‘나비 접(蝶)’인지 분명하지 않아 일단 ‘나방(또는 나비)’라고 썼음을 양해하시라. 사실 이것은 모스라라는 괴수의 모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름도 나방을 뜻하는 영어 단어 ‘모스(moth)’에서 유래되었고 설정 또한 거대 나방 괴수이지만, 생김새는 어떻게 봐도 나비.

2. 전술한 대로, 포드와 조가 원전 사고 이후 제한구역이 된 잔지라의 본가에 잠입한 장면에서 나오는 수조 속의 고치. 수조 아랫부분에는 ‘MOTHRA’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보인다. 이건 뭐 빼도박도 못하는 인용. 좀 더 자세히 보면 ‘RA’자가 포함된 어떤 레이블 위에 덧붙인 ‘DAD’S MOTH’라는 레이블이 겹쳐져 ‘MOTH’+’RA’로 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이블의 나머지 부분은 오물이 묻어 있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DAD’S MOTH’는 ‘아빠의 나방’이라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조는 평소에 취미로 나방을 사육하고 있었을까?

또 한 가지 신경 쓰였던 것이 1999년 장면에서 포드의 방에 붙어 있던 괴수영화 포스터이다. 1960년대 일본 괴수영화 포스터를 모티브로 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화면에는 일부만이 잡혔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1. 제목은 <XX라 대 바브라>(XXラ対バブラ). 당연히 가공의 괴수영화이다. 그렇지만 ‘~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일본 특촬 괴수영화의 명명법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다.

2. 포스터에 일부가 드러나 있는 괴수의 머리 부분은 아무래도 무토와 닮아 보인다.

3. 아래쪽으로는 ‘일본 · 하와이’, ‘캘리포니아’, ‘네바다’, ‘밴쿠버’라는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앞의 넷은 거의 순서대로 극중의 지리적 무대와 일치한다. 밴쿠버는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주요 촬영 장소였기 때문에 이 또한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이거 일종의 복선? 그렇게도 볼 수 있겠고, 만일 이 가공의 괴수영화가 60년대쯤 나온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시대 상황을 반영한 홍보 문구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해외 촬영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홍보 요소였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에 여러 나라가 무대로 나와 마치 ‘눈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같은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했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그 좋은 예이다.

다음은 고지라의 성격 묘사. 금문교 시퀀스에서 군 함정이 오발한 미사일이 어린이들이 탄 스쿨버스로 향하는 위기의 순간. 다리 밑에서 고지라의 등지느러미가 쑥 올라와 미사일을 대신 맞는다. 이 대목을 볼 때면 ‘감독님, 연구 많이 하셨네요’ 라며 즐거워진다. 고지라는 어린이의 친구인가? 60~70년대 시리즈의 고지라는 편을 거듭하면서 점차 인간의 아군, 지구의 수호신, 더 나아가 어린이의 친구가 되어 간다. 괴수의 습격으로 혼란에 빠진 도시, 그 와중에 어린이들이 적 괴수의 발에 납작하게 밟혀 희생되려는 순간! 고지라가 나타나 적 괴수를 한방 먹이고 아이들을 구한다는 식이다.

물론, 2014년의 고지라는 그 정도로 인간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의 고지라는 무토를 제거하려는 지구의 의지를 받아들여 묵묵히 수행하는 초월적 존재처럼 묘사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우연히(?) 스쿨버스 대신 미사일을 맞아 주는 이런 애교(?) 섞인 장면을 보노라면 에드워즈 감독은 분명히 그 시절의 고지라를 알고 있고, 역시 이를 알고 있을 팬들에게 슬쩍 윙크를 던져 줬다고 할 수 있겠다. ‘너도 알지? :^) 라면서.

그렇다면 고지라는 인간과 결코 교감하지 않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후반부 포드와 고지라가 잠시 시선을 교환하는 (보는 이의 가슴이 잠시 들렸다 내려올 만큼 멋진) 대목처럼 미묘하게 ‘고지라, 인간 애써 해지지 않아. 그러니 똑바로 해. 힘들어도 네 할 일을 해.’ 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등장인물의 대사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런 알듯 모를듯한 묘사가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고지라보다 훨씬 작고 물기가 많아 보이는 눈과 뭉툭한 머리 때문에 좀 더 우직하고 순해 보이는 2014년판 고지라의 인상과도 연결되는 바가 있다고 보고, 어떤 의미로는 킹콩 생각이 나기도 한다.

여기서 또 나올 만한 질문이 ‘고지라는 약한가?’일 텐데, 종종 힘에 부쳐하긴 해도 ‘최강!’ ‘절대무적!’임이 트레이드마크였던 본가 고지라와는 달리 2014년판은 2대 1로 온갖 비열한 전법을 써 대는 무토에 온힘을 다해 맞서면서,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며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다. 이는 무토의 흉악함과 강력함을 강조하여 격투 장면의 긴박감을 높이려는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고지라의 이미지와 더불어 그에게 더욱 감정이입하게 하는 장치로서도 훌륭하게 기능한다. 고지라의 이런 성격 또한 중요한 매력 포인트이다. 고지라가 단순히 이상하게 생긴, 건물만 때려부수고 사람만 밟아 죽이는 혐오스럽고 두렵기만 한 괴물딱지였다면 60년에 걸쳐 전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아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고지라의 거대한 덩치 속에 우리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에드워즈 감독은 정말로 고지라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밖에 몇 가지 자잘한 것들.

1. 클라이맥스의 핵폭발은 다음 편을 위한 복선일 수도 있겠다. 샌프란시스코는 차기 괴수 성지가 되는 것인가!

2. 앞서 첫 리뷰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조금 감정 과잉인 면이 있다고 쓰긴 했지만, 그가 영화 초반부를 지탱한 중심인물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크랜스턴은 도입부부터 포드에게 바톤을 넘겨주기 전까지, 이야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힘껏 끌어올리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뒤 장렬히 산화했다.

3. 크랜스턴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것도. 그가 분한 아버지 조와 애런 존슨이 분한 아들 포드와의 관계는 2001년작 <고지라 모스라 킹기도라 대괴수총공격>(약칭 GMK)을 연상시킨다. <GMK>의 고지라는 태평양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원혼들이 모여 이루어진 괴수이다. 놈은 1954년 일본을 습격한 뒤 21세기에 다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평화에 취한 채 과거의 비극을 잊지 말라’는 경고이다. 마찬가지로 조는 포드에게 잔지라 원전 사고에 대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안전한 미래는 없다고 강조한다. 물론 <고지라>라는 영화 자체가 온몸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4. 극중 비밀 조직인 ‘모나크’는 본가 고지라 시리즈에서도 여럿 등장한 G-포스나 G-그래스퍼, GPN(고지라 예지 네트워크), 특생자위대와 같은 고지라 또는 거대 생물 대책 조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영화에서는 모나크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묘사가 없어 G-포스, G-그래스퍼, 특생자위대와는 상당히 다른 성격의 조직으로 보인다(그렇다고 군사력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고지라 2000: 밀레니엄>(1999)에 나온 GPN. 하지만 이것은 좋게 말해 민간 조직, 나쁘게 말해 고지라 오타쿠들의 정보 공유를 위한 연락망 정도로서 전 세계의 중지를 모아 결성된 모나크와 1:1 비교는 어렵겠다. 오히려 홀로 잔지라 사고의 진실을 쫓는 조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확인하는 장면이 훨씬 더 GPN과 닮아 보인다. 이것도 감독의 의도적인 인용일까.

5. 고지라가 하와이 호놀루루 공항에서 처음으로 전신을 선보이는 장면과 방사열선을 발사하는 장면은 처음 볼 때나, 세 번째로 볼 때나 그 흥분과 감격이 전혀 다르지 않다. 볼 때마다 전율이 일어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6. 와타나베 켄이 분한 과학자 세리자와 이시로는 1954년 오리지널 <고지라>를 인용한 인물이다. 이름부터 그러한데, 성은 이 영화의 주역이자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기도 한 세리자와 다이스케(히라타 아키히코 분)에서, 이름은 감독 혼다 이시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고지라에 대한 학자적 흥미를 드러내며 핵미사일로 고지라와 무토를 동시에 격퇴하자는 작전에 반대한다는 점, 스텐츠와 악수를 할 때 어깨가 내려가며 가방끈이 흘러내리는* 다소 어설픈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등은 오리지널의 세리자와보다는 야마네 박사와 더 닮아 있다. (*연설 도중 넥타이가 수트 밖으로 삐져나온 걸 뒤늦게 알고는 어색하게 집어넣는 야마네 박사의 동작을 인용한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자막 번역에 대하여. 가장 짜증이 났던 것은 결말에서 죽은 줄 알았던 고지라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중계하는 TV 화면의 자막 번역이다. 이 자막의 뜻은 ‘괴수의 왕, 우리 도시의 구원자?’여야 하는데 마지막에 물음표 ‘?’를 빼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중계하는 측에서 물음표를 넣은 것은 고지라라는 존재가 양날의 검임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그가 무토를 물리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피해가 생겼으므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로 인식하고 있음을 뜻할 것이다. 하지만 번역 자막에서는 이 물음표가 없어지면서 영화의 복잡한 감정선을 단숨에 유치하고 어설프게 만들어 버렸다. 실제로 극장에서 이 자막이 떴을 때 주위에서 실소가 터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블루레이/DVD 출시 때 꼭 수정해 주었으면 한다.

‘고지라’라는 괴수

(C) Toho Co., Ltd.
(C) Toho Co., Ltd.

고지라의 별명은 ‘괴수의 왕’이다. 그와 지명도를 양분하는 또 다른 괴수인 킹콩에 비해 21년이나 늦게 태어났지만, 이른바 ‘스펙’만 본다면 고지라는 킹콩을 압도하는 사상 최강의 괴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관총 세례를 맞고 숨을 거둔, 몸집만 빼면 평범한 고릴라와 다르지 않았던 콩과는 달리 고지라는 체내에 방사능을 축적한 거대한 고대생물의 돌연변이이다. 그 생명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하고 끈질기며, 사실상 불사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단시간에 토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만큼 막대한 파괴력도 지녔다. 인간의 군대는 그의 간식거리도 안 되는 상대가 된 지 오래이고 수도 없이 밀려드는 적 괴수와 싸워 대부분 승리했으며, 심지어는 우주괴수들과도 호각으로 맞선다.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의 꽤 넓은 범위 안에서 고지라를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는 아마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1954년 스크린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고지라는 대표적인 시리즈 영화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제임스 본드보다 많은 28편의 영화에 나왔고, 헐리우드에서는 두 번째 리메이크가 만들어지고 있으며(2014년 여름 개봉), 이외에도 TV 시리즈,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중매체에 이식되었다. 완구를 비롯한 수천 종의 관련상품도 끊임없이 생산되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팬들의 지갑을 꾸준히 털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고지라가 영화 속뿐만 아니라 그 밖에 있는 현실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괴수의 왕임을, 당신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고지라는 2차대전 당시 일제의 홍보용 영화에 동원되었던 특수촬영 기술이 전후 영화산업의 환경에 맞춰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토호 영화사의 프로듀서 타나카 토모유키는 50년대 초반 일본에서 재개봉한 1933년판 <킹콩>을 보고, 괴수가 등장하는 특수촬영 영화에 대한 수요가 있음을 감지했다. 일본을 습격하는 거대 괴수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한 타나카는 이를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정교한 특수촬영 기법으로 유명했던 츠부라야 에이지,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오랜 친구이자 이후 그의 조감독으로도 활약하게 되는 혼다 이시로 감독과 힘을 합쳤다. 마침내 1954년 11월 일본에서 공개된 <고지라>는 9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히트, 이후 괴수영화를 중심으로 SF, 호러, 스릴러 등의 하위 장르로 분화되는 ‘특촬’이라는 일본 특유의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1956년에는 미국인 배우를 등장시킨 장면을 삽입하여 재편집한 미국 개봉판 <괴수왕 고지라>가 공개되어 역시 흥행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서양에도 일본 특촬영화가 꾸준히 소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고지라는 점차 인간에게 친숙해졌고, 때로는 스스로 인간의 편에 서는 캐릭터로 변모해 갔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유행의 변화와 영화계의 흥망성쇠에 좌우되는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 때문이다. 가상의 캐릭터에게 어른의 사정이란 방사능이나 재해보다 더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을 터. 고지라가 대중에게 ‘B급’이나 ‘싸구려’로 인식된 것도 그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조악한 영어 더빙과 화질로 선보였던 해외 공개용 재편집판들도 작품의 제대로 된 면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해 왔다. 물론 정말로 값싸게 서둘러 만들어진 엉성한 영화들도 분명히 있지만, 대다수의 고지라 시리즈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제작비가 투입되며 골든 위크나 여름방학, 정월 연휴철 등에 맞춰 관객들과 만나는 블록버스터이다. 다소의 부침은 있었을지언정 60년에 걸친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시리즈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고지라가 일본은 물론 세계 대중문화의 아이콘임을 증명한다.

고지라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 나왔던 이름 모를 괴물과 몇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미군이 한강에 방류한 화학약품에 의해 태어난 ‘괴물’처럼, 고지라는 원래 심해에서 잠자고 있던 고대생물이었다(그것이 당시의 고생물학 기준으로 표현된 티라노사우루스형 직립 공룡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핵실험의 방사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깨어난 고대생물은 이에 복수라도 하듯이 인간 문명을 파괴하는 거대 괴수 고지라로 거듭난다. 인간, 특히 일본인의 관점에서 고지라는 원폭과 방사능에 대한 공포의 실체화이다. 시리즈 첫 편인 <고지라>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공개되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또한, 고지라는 일본에 자주 일어나는 지진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 가운데 하나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일본인에게 그는 깊은 애증의 대상이자 사람이 아닌 것으로서 기묘한 감정이입을 하게 하는 존재이다.

괴수 특촬 장르의 퇴조로 인해 고지라 시리즈는 2004년 제28편 <고지라: 파이널 워즈>가 개봉한 뒤 일단 종료했다. 그러나 ‘최후의 전쟁’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가 되는 2014년, 헐리우드 리메이크의 결과에 따라 향방은 달라질 수 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방사능과 원자력에 대한 경각심이 더욱 높아지면서, 역설적으로 오리지널 고지라의 부활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절멸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자 운명이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두려움은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서도 힘차게 고동치는 고지라의 심장, 그것에 깃든 불사의 생명력이 그렇듯이.

* 이 글은 2012년 문화 웹진 리딩툰(현재 운영 종료)에 썼던 무비 몬스터 소개글 ‘몬스터 유한회사’ 가운데 고지라 부분을 발췌하여 가필, 수정한 것이다.

크레이그 본드의 매력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 이 글에는 <카지노 로얄>을 비롯한 크레이그 본드 시리즈의 내용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다면 주의하시라.

007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

올해 2012년은 제임스 본드가 은막에 처음으로 등장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작가 이언 플레밍이 1953년 발표한 소설 [카지노 로얄]을 통해 첫선을 보였던 가공의 첩보원 본드는 이후 여러 편의 속편 소설들과 라디오 드라마, TV용 영화, 만화 등의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1962년부터는 <살인 번호>를 시작으로 대중문화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장편영화 시리즈도 스물 세 편이나 만들어졌다(번외편까지 합치면 스물 다섯 편).

제임스 본드 영화는 역사상 가장 많은 편수가 만들어진 시리즈는 아니지만,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은 시리즈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5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세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변치 않는 인기를 누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대중을 본드 시리즈로 끌어당겼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기게 마련이다.

본드 시리즈의 인기 요인을 꼽자면 흥미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이야기, 세계 각국에서 담아 온 다채로운 배경(특히 해외여행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과거에는 더욱 더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박력 넘치도록 연출된 액션, 때로는 아기자기하고 때로는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멋진 특수차량과 비밀무기들, 본드 걸,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부른 주제가와 훌륭한 작곡가들이 만든 사운드트랙, 호쾌하고 현실도피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모험담… 만일 이러한 인기 요인이 만질 수 있는 물건이라면 양 손에 다 담기에도 벅찰 만큼일 것이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본드 시리즈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이자 매력이라면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 자신일 것이다. 특히 영화 속 본드는 거의 초인에 가까운 임무 수행 능력과 남성적 매력이 극대화된 인물로 묘사된다. 스파이 중의 스파이, 남자 중의 남자인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인물이 온갖 난관을 넘어 임무를 완수하고 아름다운 본드 걸과 함께 망중한을 즐기는 결말로 이루어진 영화가 관객을 매료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본드를 지난 50년 동안 여섯 명의 배우들이 연기해 왔다. 제1대 숀 코너리(출연작 수 번외편 제외 6편), 제2대 조지 레젠비(1편), 제3대 로저 무어(7편), 제4대 티모시 달튼(2편), 제5대 피어스 브로스넌(4편) 그리고 현역인 제6대 대니얼 크레이그(현재까지 3편)가 그들이다. 이들은 각자 본드로 살아 숨쉬었던 스물 세 편의 영화를 각기 다른 이유로 빛나게 했고, 관객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각기 다른 배우들에게, 또는 그들 모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줌으로써 보답했다. 워낙 오랫동안 많은 편수가 제작된 영화 시리즈인데다가, 같은 가상 인물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연기했기 때문에 본드는 동일인물임에도 편마다 여러 가지 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관객들이 특정한 배우가 분한 본드를 더 좋아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본드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나의 베스트 본드는 대니얼 크레이그이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라 내 경험에 한정된 바이지만, 흔히들 제1대 본드였던 숀 코너리를 최고의 본드로 꼽는 경우가 많은 듯 싶다. 조지 레젠비는 떡대 말고는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었고, 로저 무어는 좀 느끼했으며, 티모시 달튼은 좀 뻣뻣했고, 피어스 브로스넌은 그냥 무난했고, 그러니 코너리가 짱! 이라는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걸까. 뭐 다 좋다. 내 경우는 무어의 출연작인 <나를 사랑한 스파이>로 본드 시리즈를 처음 접했고, 아무래도 첫 체험이어서인지 그 후로도 여러 편의 시리즈를 보았지만, 몇 년 전까지는 이 영화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좋았다(칼리 사이먼의 주제가 “Nobody Does It Better”는 지금 들어도 살살 녹는다). 무어에 대해 말하자면, 본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배우였다. 적어도 내게는.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2006년 대니얼 크레이그의 첫 본드 출연작이자 시리즈의 리부트인 <카지노 로얄>을 감상하게 되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여기는 그럴 만한 자리가 아니므로 그 영화의 장점을 일일이 나열하진 않겠지만, 분명히 말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카지노 로얄>이 ‘혁신’이었다는 점이다. 스무 편이 넘는 장기 시리즈를 이어가다 보면 매너리즘과 피로감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그야말로 철두철미하게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감독인 마틴 캠벨은 본드를 90년대에 훌륭히 적응시킨 수작 <골든아이>(1995)를 연출한 인물이었는데, <카지노 로얄>로 같은 목적을 다른 시대에서 더 훌륭하게 이룬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니얼 크레이그가 있다. 2005년 그가 본드 역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던 비아냥 어린 목소리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금발이라 원래 설정에 맞지 않는다느니(플레밍의 소설 속 본드는 흑발이다), 너무 투박한 마스크라느니, 성적 매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얘기들. 하지만 외모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크레이그 본드는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중요한 건 배우의 머리카락 색깔이나 얼굴이 아니라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이 어떻게 행동하고 표현되는가이다. 어떻게 보면 선배들과는 달랐던 크레이그의 다소 무색무취한 이미지가 제작진이 의욕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던 시리즈의 새로운 방향성에 적합했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마치 스케치북을 가득 채운 백지처럼 말이다.

제작진이 선택한 시리즈의 중심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본드를 예전보다 훨씬 더 인간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 시작에 해당하는 <카지노 로얄>은 기존 시리즈의 리부트로서 본드의 초기 임무와 성장담(!)을 그린 이야기라는 점, 섬세한 심리 묘사에 집중한 훌륭한 각본, 크레이그를 비롯한 주요 배우들의 호연 등으로 참신한 본드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21세기 본드 시리즈에서 크레이그는 여전히 초인적인 첩보원이지만(그것이 본드의 본질이자 시리즈의 전통이므로), 그럼에도 좀 더 상처 받기 쉽고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 본드의 모습을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었다. 완벽한 인물로 알고 있던 그가 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결점 투성이이기도 합니다, 라는데 어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

본드의 인간적 매력이 가장 풍부하게 드러나는 시점은 그가 운명의 여인 베스퍼 린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이다. 임무를 위해 여자와 살을 섞곤 했던 본드는 린드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면서 첩보원이라는 직업마저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극 후반부 린드가 이중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이어 비참한 죽음을 맞으면서 본드의 절망감은 극에 달한다. 본드 최대의 위기가 부비 트랩이 아닌 사랑했던 여인의 배신이라니! <카지노 로얄>의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살인면허> 이후 본드의 감정이 가장 격정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시련을 겪으면서 첩보원으로서의 본드는 더욱 단단해지고 한 단계의 성장을 이룬다. 그것이 냉혹한 이 세계의 생존 법칙. 본드에게 그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가 바로 직속상관 M이다. 고아가 된 본드를 거두어 MI6 최고의 첩보원으로 키운 M은 그에게 마치 양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처럼 묘사된다(본드가 M을 호칭할 때 쓰는 ‘ma’am’이라는 표현은 영국식 발음 때문에 때로는 ‘mom’처럼 들린다. M이라는 이니셜은 또 어떤가). 본드 역시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M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조직의 이익과 본드 개인의 의지가 충돌할 때면, M은 여지없이 조직의 편을 든다(물론 그 역시 로봇은 아니므로 고심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본드와 M의 애증관계 역시 크레이그 본드 시리즈를 흥미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본드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극적 장치로 훌륭하게 기능한다.

그리고 이렇게 편을 거듭하면서 축적해 왔던 모든 것이 신작 <스카이폴>에서 한꺼번에 폭발한다. 본드는 도입부에서 상징적인 ‘죽음’을 맞고, 혹독한 ‘부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배후에는 M이 범할 수밖에 없었던 ‘원죄’가 있고 본드 역시 그 손아귀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에 맞서기 위해, 부활한 본드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어떤 지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대단원이 연출되는 것이다. <스카이폴>은 21세기라는 지금 이 순간, 제임스 본드가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견뎌 온 이 시리즈가 어떻게 미래를 도모할 것인지를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보여준 영화이다. 크레이그는 <스카이폴>에서 자신만의 본드 이미지를 집대성한다. 투박한 얼굴에 금발인 제임스 본드. 상처 받고 절망하지만, 결국은 다시 단단해져 적을 찢어발기고 포효하는 수컷. 크레이그의 본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응축된 채 동시에 한 인물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 그 자체가 된다. <스카이폴>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이 오르기 전, 007 테마곡이 극장 안을 가득 채우면서 50주년 기념 로고와 함께 ‘James Bond Will Return(제임스 본드는 돌아올 것이다)’이라는 약속의 메시지가 뜨는 순간, 그 순간의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크레이그 본드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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