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

내 책상 위 함대의 정비 및 재편성을 앞두고 오랜만에 함선 플라모델을 조립했다. 아카데미 과학의 1/700 USS 미주리(주 1)이다.


미주리 플라모델을 만져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초등학교 때 외국에서 일하셨던 아버지께서 플라모델을 보내 주신 적이 있다. 레벨 1/535 USS 미주리와 모노그램 1/48 F-86 세이버였다. 초등학교 한 시기 밀리터리 플라모델에 열중하긴 했지만 그때는 1/35 보병과 차량 위주였고, 이 두 키트를 받은 것은 그보다 이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접한 전함과 전투기의 정밀한 모형에 적잖이 흥분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조립이 쉽지 않아 옆집 형의 도움을 (꽤 많이) 받고서야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다.

레벨 1/535 USS 미주리
모노그램 1/48 F-86 세이버

여하튼 미주리와 세이버 플라모델을 나는 한동안 잘 갖고 놀았고, 당연히도 이 둘은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전함과 전투기로 남아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6.25, 걸프 전쟁에 이르는 미주리의 반 세기에 걸친 이력은 한국과 인연이 깊고, 영화 <언더 시즈>와 <배틀쉽>의 명장면에 등장하기도 해서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소싯적 플라모델에 얽힌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 미주리를 국내 업체 아카데미가 스냅 타이트 키트로 냈다니 흥미가 생길 수밖에.

물론 스냅 타이트라고는 해도 반다이 건플라처럼 거의 스트레스 없이 조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함선 모형은 잔 부품이 많게 마련이니 핀셋을 사용해야 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예상 대로 그것이 조립 내내 나를 괴롭혔다.

20mm 대공포 부품. 이것을 49개 조립해야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부품의 크기와 관계없이 핀과 구멍이 잘 맞지 않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구멍이 제대로 뚫리지 않은 부품도 종종 있었고, 핀셋으로 집은 잔 부품들은 구멍에서 미끄러질 때마다 핑핑 날아가 버리곤 했다. 다행히 전부 찾았고 러너에도 약간씩 여유분이 있어 ‘어느쪽 대공포를 조립하지 못했다’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립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잔 부품들은 무조건 접착하기로 하고 아예 핀을 다 잘라 버리니 조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잘 끼워지지만 헐렁한 부품에도 접착제를 흘려넣어 보강하느라 어림잡아 전체 부품의 70% 정도를 접착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소싯적과 달리 온전히 내 손으로 완성한 USS 미주리이다. 나는 흘수선 밑을 재현하지 않는 이른바 ‘워터라인’ 형태를 좋아하므로 함체 하부는 조립하지 않았다. 스티커는 함수와 함미 양쪽의 함번 ’63’과 함미 중앙의 함명 ‘MISSOURI’, 그리고 깃발만 붙였다.

갑판과 각종 포, 그리고 굴뚝 등이 색분할되었고 성조기 스티커도 제법 눈에 띄어서, 색칠하지 않으면 온통 회색인 여타 함선 모형보다 한결 보기 좋다. 잔 부품과 씨름하느라 여기저기 접착제 얼룩이 있지만 사진으로는 눈에 잘 띄지 않아 다행스럽다.






사실 미주리를 구입한 건 옛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고지라와 관련이 있기도 해서이다. <고지라 대 콩>에서 고지라가 등지느러미로 반토막 낸 전함이 바로 아이오와급이기 때문이다. 가상의 아이오와급으로 추정되고 함명도 판명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 <고지라 대 콩>의 장면 일부가 아이오와급 전함 중 가장 유명하고 지금은 퇴역하여 하와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있는 미주리에서 촬영되었으니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앞서 <고지라>(2014)에 등장한 항공모함 USS 새러토가 장면의 무대도 미주리였다.


다음 목표는 고지라와 콩의 항공모함 대결 재현(주 2). 여기저기 알아보니 영화에 나온 항공모함은 니미츠급이라는 모양이다. 니미츠급은 아카데미도 몇 종 낸 바 있는데 1/800 또는 1/720인 걸 보니 오래된 키트인 것 같고, 공식 웹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설명서에 따르면 함체 하부를 잘라내지 않는 이상 워터라인 형태로 조립할 수 없다. 다른 업체에서 나온 적당한 키트가 있는지 좀 더 찾아봐야겠다.

(C) Warner Bros. Pictures / Legendary Pictures / Toho Co., Ltd.

(주 1) 아카데미의 1/700 미주리 키트는 두 종류이다. 하나는 실물의 색깔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 접착제 없이 조립할 수 있다는 MCP(Multi Color Parts, 2016년 11월 발매), 다른 하나는 상부 전체가 회색으로 성형되었고 에칭 부품과 갑판 마스킹 실 등이 추가된 모델러 에디션(2017년 4월 발매)이다. 전자는 초심자용이고 후자는 중급자 이상 모델러용이라 할 수 있지만 금형은 같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스냅 타이트(‘초보자도 쉽게 조립!’)를 장점의 하나로 내세운 MCP지만, 위에 적은 바와 같이 MCP도 접착제 없이는 절대로 완성할 수 없다.

(주 2) 무비 몬스터 시리즈와 S. H. 몬스터아츠는 제품 사양에 축척을 표기하지 않지만, 고지라와 콩에 관한 한 1/700 함선 모형과 얼추 비슷한 축척이다. 예를 들어 고지라는 무비 몬스터와 몬스터아츠 모두 약 16cm 높이인데, 이는 고지라 2021의 설정 신장 약 120m를 700으로 나눈 값인 약 17cm의 근사치이다. 축척의 1cm는 실제 크기에서 큰 차이겠지만 가벼운 놀이에서 정확한 수치를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드림 토미카 고지라, 7월 발매

타카라 토미의 유명 미니카 브랜드 ‘토미카’가 드림 토미카 고지라를 7월 18일 발매한다. 정가는 700엔(소비세 8% 제외 가격).

(C) Toho Co., Ltd.
(C) Toho Co., Ltd.

자동차라기보다는 장갑차에 가까운 모습인데, 그래도 고지라의 얼굴이나 등지느러미, 비늘과 같은 특색 있는 외형을 잘 살리고 있다. 나름대로 귀엽기도 하다.

드림 토미카는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캐릭터를 소재로 한 독특한 디자인의 미니카로 구성된 토미카의 방계 브랜드. 월트 디즈니, 피너츠, 헬로 키티, 리락쿠마, 배트맨, 트랜스포머, 스피드 레이서 등 여러 종류의 라인업을 판매 중이다.

아래 사진은 어제 개막한 토쿄 장난감 쇼에서 공개된 시제품(오른쪽). 왼쪽에 있는 것은 [피너츠]에 등장하는 벨을 모티브로 한 드림 토미카이다.

(C) Toho Co., Ltd. / (C) Peanuts Worldwide LLC
(C) Toho Co., Ltd. / (C) Peanuts Worldwide LLC

출처: 빅 카메라, 하비 서치 피겨 트위터
관련 링크: 타카라 토미의 드림 토미카 공식 웹사이트

크레이그 본드의 매력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 이 글에는 <카지노 로얄>을 비롯한 크레이그 본드 시리즈의 내용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다면 주의하시라.

007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

올해 2012년은 제임스 본드가 은막에 처음으로 등장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작가 이언 플레밍이 1953년 발표한 소설 [카지노 로얄]을 통해 첫선을 보였던 가공의 첩보원 본드는 이후 여러 편의 속편 소설들과 라디오 드라마, TV용 영화, 만화 등의 주인공으로 활약했고, 1962년부터는 <살인 번호>를 시작으로 대중문화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장편영화 시리즈도 스물 세 편이나 만들어졌다(번외편까지 합치면 스물 다섯 편).

제임스 본드 영화는 역사상 가장 많은 편수가 만들어진 시리즈는 아니지만,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은 시리즈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5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세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변치 않는 인기를 누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대중을 본드 시리즈로 끌어당겼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기게 마련이다.

본드 시리즈의 인기 요인을 꼽자면 흥미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이야기, 세계 각국에서 담아 온 다채로운 배경(특히 해외여행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과거에는 더욱 더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박력 넘치도록 연출된 액션, 때로는 아기자기하고 때로는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멋진 특수차량과 비밀무기들, 본드 걸,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부른 주제가와 훌륭한 작곡가들이 만든 사운드트랙, 호쾌하고 현실도피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모험담… 만일 이러한 인기 요인이 만질 수 있는 물건이라면 양 손에 다 담기에도 벅찰 만큼일 것이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본드 시리즈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이자 매력이라면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 자신일 것이다. 특히 영화 속 본드는 거의 초인에 가까운 임무 수행 능력과 남성적 매력이 극대화된 인물로 묘사된다. 스파이 중의 스파이, 남자 중의 남자인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인물이 온갖 난관을 넘어 임무를 완수하고 아름다운 본드 걸과 함께 망중한을 즐기는 결말로 이루어진 영화가 관객을 매료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본드를 지난 50년 동안 여섯 명의 배우들이 연기해 왔다. 제1대 숀 코너리(출연작 수 번외편 제외 6편), 제2대 조지 레젠비(1편), 제3대 로저 무어(7편), 제4대 티모시 달튼(2편), 제5대 피어스 브로스넌(4편) 그리고 현역인 제6대 대니얼 크레이그(현재까지 3편)가 그들이다. 이들은 각자 본드로 살아 숨쉬었던 스물 세 편의 영화를 각기 다른 이유로 빛나게 했고, 관객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각기 다른 배우들에게, 또는 그들 모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줌으로써 보답했다. 워낙 오랫동안 많은 편수가 제작된 영화 시리즈인데다가, 같은 가상 인물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연기했기 때문에 본드는 동일인물임에도 편마다 여러 가지 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관객들이 특정한 배우가 분한 본드를 더 좋아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본드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나의 베스트 본드는 대니얼 크레이그이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라 내 경험에 한정된 바이지만, 흔히들 제1대 본드였던 숀 코너리를 최고의 본드로 꼽는 경우가 많은 듯 싶다. 조지 레젠비는 떡대 말고는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었고, 로저 무어는 좀 느끼했으며, 티모시 달튼은 좀 뻣뻣했고, 피어스 브로스넌은 그냥 무난했고, 그러니 코너리가 짱! 이라는 이야기도 들어 보았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걸까. 뭐 다 좋다. 내 경우는 무어의 출연작인 <나를 사랑한 스파이>로 본드 시리즈를 처음 접했고, 아무래도 첫 체험이어서인지 그 후로도 여러 편의 시리즈를 보았지만, 몇 년 전까지는 이 영화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좋았다(칼리 사이먼의 주제가 “Nobody Does It Better”는 지금 들어도 살살 녹는다). 무어에 대해 말하자면, 본드의 플레이보이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배우였다. 적어도 내게는.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2006년 대니얼 크레이그의 첫 본드 출연작이자 시리즈의 리부트인 <카지노 로얄>을 감상하게 되면서 완전히 뒤바뀌었다. 여기는 그럴 만한 자리가 아니므로 그 영화의 장점을 일일이 나열하진 않겠지만, 분명히 말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카지노 로얄>이 ‘혁신’이었다는 점이다. 스무 편이 넘는 장기 시리즈를 이어가다 보면 매너리즘과 피로감이 생기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그야말로 철두철미하게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감독인 마틴 캠벨은 본드를 90년대에 훌륭히 적응시킨 수작 <골든아이>(1995)를 연출한 인물이었는데, <카지노 로얄>로 같은 목적을 다른 시대에서 더 훌륭하게 이룬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니얼 크레이그가 있다. 2005년 그가 본드 역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던 비아냥 어린 목소리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금발이라 원래 설정에 맞지 않는다느니(플레밍의 소설 속 본드는 흑발이다), 너무 투박한 마스크라느니, 성적 매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얘기들. 하지만 외모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크레이그 본드는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중요한 건 배우의 머리카락 색깔이나 얼굴이 아니라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이 어떻게 행동하고 표현되는가이다. 어떻게 보면 선배들과는 달랐던 크레이그의 다소 무색무취한 이미지가 제작진이 의욕적으로 모색하고 있었던 시리즈의 새로운 방향성에 적합했던 것이 아니었나 한다. 마치 스케치북을 가득 채운 백지처럼 말이다.

제작진이 선택한 시리즈의 중심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본드를 예전보다 훨씬 더 인간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 시작에 해당하는 <카지노 로얄>은 기존 시리즈의 리부트로서 본드의 초기 임무와 성장담(!)을 그린 이야기라는 점, 섬세한 심리 묘사에 집중한 훌륭한 각본, 크레이그를 비롯한 주요 배우들의 호연 등으로 참신한 본드의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 21세기 본드 시리즈에서 크레이그는 여전히 초인적인 첩보원이지만(그것이 본드의 본질이자 시리즈의 전통이므로), 그럼에도 좀 더 상처 받기 쉽고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 본드의 모습을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주었다. 완벽한 인물로 알고 있던 그가 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결점 투성이이기도 합니다, 라는데 어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

본드의 인간적 매력이 가장 풍부하게 드러나는 시점은 그가 운명의 여인 베스퍼 린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이다. 임무를 위해 여자와 살을 섞곤 했던 본드는 린드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면서 첩보원이라는 직업마저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극 후반부 린드가 이중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이어 비참한 죽음을 맞으면서 본드의 절망감은 극에 달한다. 본드 최대의 위기가 부비 트랩이 아닌 사랑했던 여인의 배신이라니! <카지노 로얄>의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살인면허> 이후 본드의 감정이 가장 격정적으로 드러난 대목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개인적 시련을 겪으면서 첩보원으로서의 본드는 더욱 단단해지고 한 단계의 성장을 이룬다. 그것이 냉혹한 이 세계의 생존 법칙. 본드에게 그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가 바로 직속상관 M이다. 고아가 된 본드를 거두어 MI6 최고의 첩보원으로 키운 M은 그에게 마치 양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처럼 묘사된다(본드가 M을 호칭할 때 쓰는 ‘ma’am’이라는 표현은 영국식 발음 때문에 때로는 ‘mom’처럼 들린다. M이라는 이니셜은 또 어떤가). 본드 역시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M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조직의 이익과 본드 개인의 의지가 충돌할 때면, M은 여지없이 조직의 편을 든다(물론 그 역시 로봇은 아니므로 고심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본드와 M의 애증관계 역시 크레이그 본드 시리즈를 흥미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본드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극적 장치로 훌륭하게 기능한다.

그리고 이렇게 편을 거듭하면서 축적해 왔던 모든 것이 신작 <스카이폴>에서 한꺼번에 폭발한다. 본드는 도입부에서 상징적인 ‘죽음’을 맞고, 혹독한 ‘부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배후에는 M이 범할 수밖에 없었던 ‘원죄’가 있고 본드 역시 그 손아귀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이에 맞서기 위해, 부활한 본드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어떤 지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대단원이 연출되는 것이다. <스카이폴>은 21세기라는 지금 이 순간, 제임스 본드가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견뎌 온 이 시리즈가 어떻게 미래를 도모할 것인지를 더할 나위 없이 멋지게 보여준 영화이다. 크레이그는 <스카이폴>에서 자신만의 본드 이미지를 집대성한다. 투박한 얼굴에 금발인 제임스 본드. 상처 받고 절망하지만, 결국은 다시 단단해져 적을 찢어발기고 포효하는 수컷. 크레이그의 본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응축된 채 동시에 한 인물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 그 자체가 된다. <스카이폴>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이 오르기 전, 007 테마곡이 극장 안을 가득 채우면서 50주년 기념 로고와 함께 ‘James Bond Will Return(제임스 본드는 돌아올 것이다)’이라는 약속의 메시지가 뜨는 순간, 그 순간의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크레이그 본드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
(C) Eon Productions, Danjaq LLC, United Artists Corporation, Columbia Pic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