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스] (2012)

(C) Marvel Studios
(C) Marvel Studios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어벤저스>(The Avengers)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을 보아 왔다. 한 편에 한 명 또는 그 이상씩 소개된 수퍼히어로와 그 주변 등장인물들은 우리에게 현실에 기반을 두었으면서도, 사실상 무엇이든 가능할 법한 어떤 세계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었다. 이제,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어벤저스>에서 우리는 그 세계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 영화 세계, 이하 MCU) – 속으로 본격적인 여행을 떠난다.

MCU를 이루는 모든 영화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인크레더블 헐크>는 매력적인 구석이 제법 있었지만 연출과 각본의 전체적인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아이언 맨 2>와 <토르>,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는 그보다 나았지만, 기적적으로 균형을 맞춤으로써 수퍼히어로 영화의 모범사례가 된 첫 편 <아이언 맨>의 만듦새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MCU는 편을 거듭하면서 하나의 가상 세계를 만들기 위한 기초공사를 차근차근 다져왔다. 마블 스튜디오가 거의 매년 연작을 내면서 평작은 있을망정 어느 한 작품 파탄되지 않도록 품질 유지를 해 온 것은 사실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반면 MCU에 대해 ‘2시간짜리 예고편’이니 ‘떡밥 제조기’이니 하며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건 나쁜 면만을 보려는 비틀린 시선이었다고 본다.

<어벤저스>는 MCU 영화들 한 편 한 편이 독립적인 작품으로서도 가치 있음을 증명해 낸다. 마블 스튜디오가 조스 위든에게 <어벤저스>의 연출을 맡긴 것은 어쩌면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MCU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압축하여 추출했을 때 결국 캐릭터와 배경을 구축한다는 것만 남는다면, 위든이야말로 그 정수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감독 가운데 한 명인 것이다. 그건 영화가 시작된 지 단 몇 분이면 알 수 있다. 위든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서로 이질적인 존재들(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우주에서 온 신도 있다)이 같은 목적 아래 모였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지극히 경제적으로 엮어낸다. 플롯보다는 캐릭터가 우선인 이야기에서 이 경제성은 빛을 발하고, 이미 탄탄하게 구축된 성격과 설정이 이에 맞물려 상상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한다. 한 편의 이야기에 허락된 범위 안에서 놀라우리만치 넓고 깊이가 있으며 다양한 에피소드가 기름이 잘 먹은 톱니바퀴처럼 촘촘하면서도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어떤 캐릭터도 ‘분량’이나 ‘비중’이라는 괴물에 희생되지 않는다.

아울러 위든은 그 조밀한 틈과 틈 사이까지도 든든하게 채워 넣는다. 얄미울 만큼 영리한 유머와 위트, 그리고 일급의 스펙터클로 말이다. 이미 잘 짜인 이야기에 환상적인 조미료가 더해지자, <어벤저스>는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범주를 넘어 여름 블록버스터로서도 최상의 수준에 도달한다. 비범한 존재들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있을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수퍼히어로 신화의 전형적인 포맷이지만, <어벤저스>는 전례 없이 커져 버린 규모임에도 길을 잃지 않는다. 여태까지 이런 소재를 이토록 훌륭하게 빚어낸 헐리우드 수퍼히어로 영화는 <스파이더맨 2>와 <X-멘: 퍼스트 클래스>, 그리고 <다크 나이트> 정도밖에 없다.

<아이언 맨>이후 4년을 기다렸던 영화. 그리고 수퍼히어로라는, 알록달록한 스판덱스나 갑옷을 입은 힘세고 영리한 존재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어떤 이들은 반생을 기다려야 했을 영화. 나는 그들에게 <어벤저스>가 ‘기다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어벤저스>는 영화를 이루는 모든 순간, 심지어는 프레임 한 조각까지도 그들을 위한 선물꾸러미로 가득 차 있는 행복한 축제이다.

원제: The Avengers
감독: 조스 위든
주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에반스,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스칼렛 조핸슨, 제레미 레너, 새뮤얼 L. 잭슨
북미 개봉: 2012년 5월 4일
한국 개봉: 2012년 4월 26일

[X-멘: 퍼스트 클래스] (2011)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C) 20th Century Fox, Marvel Entertainment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X-멘>과 그 속편 <X2>가 그토록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는 인간의 편견과 그것으로부터 가지를 친 차별과 소외, 억압 그리고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틀에 요령 있게 녹여냄으로써, 대중영화/장르영화의 참신한 전범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싱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지녔다는 이유로 고통 받아야 했던 뮤턴트들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락은 물론 주제 의식도 탄탄하게 갖춘 수퍼히어로 영화를 빚어냈다. 내가 보기에 이들 두 편의 영화, 특히 제1편 <X-멘>은 수퍼히어로 영화 붐의 결정적인 촉발점이 된 <스파이더맨> 이전에 이미 21세기 수퍼히어로 영화의 나아갈 방향을 성공적으로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관객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분명한 주제 의식, 현실의 물리법칙을 최대한 준수하면서도 수퍼히어로의 신화적 매력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은 세밀하고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은 <X-멘>의 뒤를 이었던 수많은 수퍼히어로 영화 가운데 불과 몇 편만이 제대로 이뤄냈을 뿐이다.

싱어는 이 프리퀄 <X-멘: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에서 제작자로 물러났고, 이번에는 <킥애스>로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뽐냈던 매튜 본이 감독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싱어가 <X-멘>과 <X2>에서 유지했던 핵심은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그 빛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로 시대 배경을 다소 느슨하게 제시했던 전편과는 달리 약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그린 <퍼스트 클래스>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 60년대 인권운동이나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의 현대사와 X-멘의 결성이라는 수퍼히어로 세계의 신화를 과감히 연결한다. 이야기의 시공간은 더욱 구체적으로 설정되고, 전편에서 불거졌던 갈등의 원인과 숨겨졌던 이야기들이 밝혀지면서 X-멘의 영화 세계는 한층 더 복잡해지고 생동감을 띤다. <퍼스트 클래스>는 단순히 X-멘 영화 시리즈 여기저기에 뚫린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임무를 아주 훌륭히 수행하는 것은 물론, X-멘 영화 세계를 의미 있게 확장한다.

<퍼스트 클래스>의 연출이 완전무결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편보다 등장인물이 두세 배는 늘어났고 그 대부분은 뮤턴트다. 아마도 그들의 초능력을 하나씩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상영시간의 절반은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 X-멘 결성이라는 중요한 플롯 포인트를 엮어야 하고, 제목이 뜻하는 바에 맞춰 뮤턴트들이 훈련할 시간도 필요하다. 프리퀄이니만큼 X교수, 매그니토, 미스틱 등 주요 등장인물 각각의 이야기를 발굴, 발전시키되 전편과 무리 없이 연결시켜야 하고, 조단역급 뮤턴트들도 다루어야 한다. 원작 및 전편 팬들을 즐겁게 해 줄 인용과 서비스도 군데군데 뿌려 두어야 한다(그 중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것들도 몇 가지 있다). 여름 블록버스터 전쟁 참전작이니 액션과 시각효과도 잘 짜 넣어야 한다. 장면이 매우 빠르게 바뀌어 가고, 그때마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와 새로운 초능력을 선보이거나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는 등 계속해서 못 보던 무엇인가를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정보량이 아무튼 굉장히 많다. 집중해서 보아야 하고, 가능하면 두어 번 다시 보기를 권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구성상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퍼스트 클래스>는 기적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다. 100%는 아니지만, 98% 이상이라고 할까. 단 한 장면도 낭비되지 않았고, 묘사는 간결하며 군살이 없다. 어쩌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 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거슬릴 만큼은 아니다. 보고 나면 이야기와 주제가 깔끔히 정리된다. 무엇보다도 <X-멘>과 <X2>의 유전자를 한 톨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계승하고 있어 그 매력과 향기를 한껏 느낄 수 있으니 기쁘다. 배우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등장인물을 살아 숨쉬도록 연기했지만, 특히 제임스 매커보이와 마이클 파스벤더는 뛰어나다. 케빈 베이컨도 제법 위협적인 악역을 잘 소화했다. 그야말로 발군의 만듦새. 전편의 완성도에 버금가는 것은 물론, <아이언 맨>이나 <스파이더맨> 1, 2편을 잇는 ‘최고의 마블 수퍼히어로 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X-멘: 최후의 전쟁>과 <X-멘 탄생: 울버린>에 실망했던 팬이라면, <퍼스트 클래스>는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은 작품이다. 사실 이것은 보통 단비가 아니다. <퍼스트 클래스>는 멋진 X-멘 영화에 목말라 있었던 팬들을 촉촉하고 따뜻하게 적셔 주고, 그들의 가슴을 힘차게 뛰게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바라 왔던 바로 그 X-멘 영화, 아니, 분명히 그 이상이다.

원제: X-Men: First Class
감독: 매튜 본
주연: 제임스 매커보이, 마이클 파스벤더, 제니퍼 로렌스, 케빈 베이컨, 니콜라스 홀트
북미 개봉: 2011년 6월 3일
한국 개봉: 2011년 6월 2일

[가디언의 전설] (2010)

(C) Warner Bros. Pictures
(C) Warner Bros. Pictures

‘영상은 좋지만, 이야기가 약하다.’ 광고나 뮤직 비디오 업계에서 영화로 건너온 감독들의 작품을 평할 때 관용구처럼 쓰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짧은 시간 안에 이미지와 그 속의 메시지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이들 매체와 좀 더 긴 호흡으로 이끌어야 하는 영화 사이의 큰 차이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어 왔지만, 때로는 이 분야 출신 감독들이 ‘이야기를 다룰 줄 모른다’는 편견이 개입되어 종종 남용되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편견에 값하는 영화들도 있기는 했다.

<가디언의 전설>(Legend of the Guardians: The Owls of Ga’Hoole)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 감독도 광고를 통해 유명세를 얻으며 영화계로 넘어왔다. 그렇지만 스나이더는 영상과 이야기를 독특한 감각으로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아왔다. 데뷔작인 <새벽의 저주>부터 바로 전 작품인 <워치멘>까지, 스나이더는 폭발하고 질주하는 듯한 이미지를 살린 인상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관람 전까지 그 높은 기대치만큼이나 나를 불안하게 했던 <워치멘>만 해도, 스나이더는 복잡한 플롯과 강렬한 정치적, 시대적 메시지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그래픽 노블보다 더 그래픽 노블다운 영화, 이미지가 내러티브이고 내러티브가 이미지인 영화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3D 애니메이션 <가디언의 전설>도 영상의 질 만큼은 독보적인 수준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영화의 화면은 3D 영화의 새로운 경지에 ‘거의’ 근접했다. 올빼미들은 문자 그대로 얼이 빠질 만큼 사실적이다. 공들여 작업한 흔적이 너무나도 확연히 드러나는 올빼미들의 컴퓨터 그래픽은 정교한 3D 효과와 결합하여 경이로운 실재감을 창출해 낸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저렇게 인간과 똑같은 수준의 지능과 감정을 가졌고, 갑옷과 무기를 만들 줄 알며, 마법과 신화와 역사가 혼재된 시간을 사는 특별한 올빼미들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덧붙여 3D 입체영상이라는 마술은 관객이 올빼미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여기에 아이맥스 대형 화면이 곁들여진다면 그 효과는 다섯 배쯤 더 난다). 3D 비행 장면 연출에 한 획을 그었던 <드래곤 길들이기>의 박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유감스럽게도 <가디언의 전설>에서 스나이더의 연출은 나사가 빠져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그럭저럭 유지되지만, 군데군데 필요하다 싶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때로는 마땅히 A에서 B를 거쳐 C로 넘어가야 할 대목을 A에서 C로 어물쩍 뛰어넘어 버린다. 어떤 장면들은 연결이 퍽 어색하고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이야기는 압도적인 박력을 선보인 영상과 제대로 융합하지 못한 채 계속 겉돈다. 그렇다고 흥미롭거나 좀 튀는 캐릭터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렇고 그런 족속뿐이다. 그런 캐릭터들이 이미 앞일이 빤히 내다 보이는 정해진 길을 따라 가면 모든 일이 너무나 쉽게 해결되어 버리니, 마음 속에 남는 여운이 옅을 수밖에 없다.

각색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세 권 분량의 원작을 한 시간 반이 조금 넘는 영화로 줄이자니 가지치기가 상당히 많았으리라.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살이 다 발려지고 뼈만 남은 꼴이 되었다.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임을 감안하더라도, <가디언의 전설>은 얼개만 간신히 남은 영웅신화이다. 그리고 ‘영상은 좋지만, 이야기가 약하다’는 평을 들을 만한 영화이다. 본편 상영 전에 선보였던 ‘로드 러너’ 단편이 똑같이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원제: Legend of the Guardians: The Owls of Ga’Hoole
감독: 잭 스나이더
주연: 짐 스터지스, 휴고 위빙, 에밀리 바클레이, 애비 코니쉬, 라이언 콴튼
북미 개봉: 2010년 9월 24일
한국 개봉: 2010년 10월 28일

[타이탄] (2010)

(C) Warner Bros. Pictures
(C) Warner Bros. Pictures

<타이탄>(Clash of the Titans)은 그리스 신화 가운데 페르세우스의 모험담을 각색한 1981년 영화 <타이탄족의 멸망>을 다시 만든 작품이다. 81년판 오리지널의 각본과 연출에는 그다지 특징이 없었지만 로렌스 올리비에, 매기 스미스, 버제스 메레디스 등 베테랑 배우들의 능숙한 연기가 극에 어느 정도 활력을 불어넣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리지널 영화를 유명하게 한 사람은 스톱 모션 시각효과의 대가 레이 해리하우젠이었다. 그가 스크린 위에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되살려낸 크라켄, 메두사, 페가수스 등 다양한 환수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타이탄족의 멸망>은 신화의 모험담과 환상적인 볼거리에 집중한다는 본분에 충실한 오락 대작이었다.

2010년판 <타이탄> 역시 그러하다. 떠오르는 액션 스타 샘 워딩턴이 주인공 페르세우스를 연기하였고 리암 니슨이나 레이프 파인즈, 피트 포슬스웨이트 같은 중견 배우들이 무게중심을 부담하였다. <트랜스포터>, <더 독>, <인크레더블 헐크>를 연출했던 루이 르테리에 감독은 오리지널의 열렬한 팬임을 공언하며 웅장한 세트와 정교한 의상, 보기만 해도 신화적 흥취가 물씬 풍기는 엄선된 야외 촬영으로 꾸민 화려한 무대에 현재의 첨단 영상 기술을 마음껏 활용한 액션을 가득 채워 넣었다. 페르세우스 일행이 거대 전갈들과 싸움을 벌이는 대목과 클라이맥스에서 크라켄이 출현하는 대목은 속도감과 중량감을 고루 살려낸 명장면이다.

요즘 오락영화 추세와 관객 입맛에 맞추어 영상의 톤을 조금 어둡게 하고 페르세우스가 반신반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갈등한다는 설정으로 양념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캐릭터 묘사가 얄팍하고 전개가 가끔 들쑥날쑥하지만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적어도 환상적인 이야기에 푹 빠지려는 순간 느끼는 가슴속 두근거림은 81년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도 메두사 시퀀스가 좀 아쉽긴 하다. 오리지널에서는 조마조마한 긴장감이 일품이었는데, 이번에는 CG 메두사가 퍽 볼만했음에도 연출이 장면의 분위기를 잘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타이탄>의 진짜 문제는 3D이다. 이 영화는 성급하고 무리한 3D 변환이 영화 관람을 어떻게 망칠 수 있는지를, 3D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 <아바타>가 나온 지 불과 넉 달도 안 된 시점에서 여실히 보여 주었다. 사실 <타이탄>은 3D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잠재력을 지녔다. 원전인 신화 자체가 스릴 넘치는 대목으로 가득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아닌가. 21세기의 기술로 부활한 신화를 3D 영상으로 감상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공동 제작사인 워너 브라더스와 레전더리 픽처스는 3D 상영이라는 결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애초에 2D로 촬영한 영상을 후반작업이 진행 중이던 지난 1월에야 3D로 전환한다며 뒤늦게 유행에 편승했다. 처음부터 3D 영화로 기획했고 10년이 넘는 시간과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 <아바타>에 비하면 그야말로 거저 먹으려는 상술이다.

개봉일을 1주일 미루긴 했지만 불과 10주만에 뚝딱 만들어 낸 <타이탄>의 3D 영상은 결국 우려했던 대로 조잡한 수준이었다. 영상이 관객의 눈에 어떻게 보여질 지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채 2D를 그대로 변환한 탓에 화면은 깊이가 없고 지극히 평면적이다. 액션 장면에서는 컷을 잘게 나누어 빠르게 전환하는 데다가 카메라를 흔들어서 촬영했기 때문에 관객이 화면의 입체감을 지각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 버리기 일쑤다. 단지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속으로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받으며,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어지러움과 쓰라린 눈 뿐이다.

나는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영화를 제법 즐겼기에 조만간 다시 한 번 볼 생각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일반 상영관에서 2D로 감상할 것이다. <타이탄>은 더 비싼 입장료를 내고 3D로 볼 가치가 없는 영화이다.

원제: Clash of the Titans
감독: 루이 르테리에
주연: 샘 워딩턴, 리암 니슨, 레이프 파인즈, 젬마 아터튼, 매즈 미켈슨, 피트 포슬스웨이트
북미 개봉: 2010년 4월 2일
한국 개봉: 2010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