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 없는 전쟁] (1973)

(C) Toei
(C) Toei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인 히로시마 야쿠자 항쟁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후카사쿠 킨지 감독은 핸드헬드 카메라로 포착한 거칠고 동적인 화면과 마치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현장감을 자아내는 편집, 주인공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맞추는 대신 등장인물 전체를 아우르는 군상의 모습을 그리는 데 집중한 연출 등으로 기존 범죄영화의 틀을 과감히 부수고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극중의 야쿠자들은 과거 임협영화에 등장했던, 의리를 중시하는 낭만적인 반영웅이 아니라 이권을 위해서라면 같은 조직의 부하를 팔아먹거나, 동료의 등에 칼 꽂기를 서슴지않는 냉혹하고 치졸한 욕망의 화신이다. 그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돈과 복수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의 비릿함은 실로 압권. 전후 일본 사회의 어두운 뒷골목을 생생히 담아낸 드라마로서도, 주먹과 권총, 칼이 빗발치듯 화면을 가로지르는 폭력 활극으로서도 부족한 데가 없는 걸작이다.

2000년대까지 여러 편의 후속작으로 이어지며 이른바 ‘실록 영화’ 붐을 일으켰고 키타노 타케시, 미이케 타카시, 소노 시온, 윌리엄 프리드킨, 쿠엔틴 타란티노 등 일본 안팎의 후대 창작자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일본영화의 유산. 이번 영화제에서는 35mm 필름으로부터 새로이 리마스터한 복원판을 상영한다.

원제: 仁義なき戦い
감독: 후카사쿠 킨지
주연: 스가와라 분타, 마츠카타 히로키, 카네코 노부오, 타나카 쿠니에, 이부키 고로
일본 개봉: 1973년 1월 13일

* 2015년 7월 16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제1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카탈로그 게재용으로 기고한 글이다.

[고지라]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정보

(C) Warner Bros. Pictures / Legendary Pictures / Toho Co., Ltd.
(C) Warner Bros. Pictures / Legendary Pictures / Toho Co., Ltd.

<고지라>(Godzilla) 리메이크의 개봉에 맞춰 영화음악을 담은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이 CD와 디지털 다운로드로 발매된다. 발매일은 북미 기준으로 5월 13일. 음반사는 워너 브라더스의 영화음악 전문 레이블 워터타워 뮤직이다.

<고지라>의 음악은 골든 글로브상과 그래미상 등을 수상한 유명 작곡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이다. 주요 작품은 <시리아나>, <페인티드 베일>, <황금 나침반>, <색, 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판타스틱 Mr. 폭스>, <뉴 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킹스 스피치>, <트리 오브 라이프>, <문라이즈 킹덤>, <아르고>, <필로미나의 기적>,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으로 잔잔한 드라마부터 대규모 블록버스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에 참여하였다.

수록곡은 모두 20곡이다.

1. Godzilla! (고지라!)
2. Inside the Mines (탄광 속에서)
3. The Power Plant (발전소)
4. To Q Zone (Q 구역으로 향하다)
5. Back to Janjira (잔지라로 돌아가다)
6. Muto Hatch (뮤토의 부화)
7. In the Jungle (정글 속에서)
8. The Wave (파도)
9. Airport Attack (공항 습격)
10. Missing Spore (사라진 포자)
11. Vegas Aftermath (베이거스 사건의 여파)
12. Ford Rescued (포드 구출되다)
13. Following Godzilla (고지라를 따라서)
14. Golden Gate Chaos (금문교의 혼돈)
15. Let Them Fight (놈들끼리 싸우게 합시다)
16. Entering the Nest (둥지 속으로 진입하다)
17. Two Against One (2대 1)
18. Last Shot (마지막 한 발)
19. Godzilla’s Victory (고지라의 승리)
20. Back to the Ocean (바다로 돌아가다)

극중 데스플라가 어떤 선율을 들려 줄지, 그리고 혹 이후쿠베 아키라의 고지라 테마 등 팬들의 귀에 익숙한 곡이 삽입될지 여러 모로 궁금하다. 현재 국내 발매 정보는 나와 있지 않은데, 라이센스로 나오진 않더라도 소량 수입 정도는 될 것으로 보인다.

출처: 워터타워 뮤직 공식 웹사이트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2003)

(C) 「あずみ」制作委員会
(C) 「あずみ」制作委員会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

25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あずみ / 키타무라 류헤이 감독, 이하 <아즈미>)은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란으로 신음하고 있는 전국시대의 일본.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더 이상의 비극을 막고자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미리 처단하기 위한 정예 살수 집단을 비밀리에 양성한다. 그 구성원은 전란으로 부모를 잃은 소녀 아즈미를 비롯한 10명의 고아들. 혹독한 훈련의 마지막 날, 둘씩 짝을 지어 서로를 베어야 하는 처절한 관문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5명은 오직 정적의 처단만을 위한 기나긴 여정에 나서게 된다.

<아즈미>는 기본적으로 전국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을 취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어떤 일본 시대극보다도 판타지 성격이 강하다. CG와 특수촬영이 잔뜩 사용된 화면과 시대가 뒤섞인 듯한 기괴한 스타일의 의상, 너무나 현대적인 대사를 읊는 아이돌 스타의 대거 기용 등 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고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이며, 가장 일본적인 소재를 사용했으면서도 전혀 일본적이지 않은 영화의 성격을 반영한다. ‘<아즈미>는 일본의 <킬 빌>’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사용될 만큼, 이 영화는 세계 어느 곳의 관객과 만나도 무난한 반응을 이끌어 내도록 계산적으로 만들어졌다. 더욱이, 소위 ‘컬트’ 코드로 영화판에 뛰어든 키타무라 류헤이 감독은 가뜩이나 과장된 설정의 이 판타지 시대극을 마치 <매트릭스>나 <이퀼리브리엄> 같은 감각으로 찍어 내어, 영화를 보고 나면 온몸에 과다 분비되고 남은 아드레날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아즈미와 200명이 넘는 무사들이 맞붙는 클라이맥스의 대결전에서 수직으로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워크, 한 장면에서 액션의 속도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등의 연출은 보통 일본식 칼부림 영화와는 확실히 차별된 이미지를 구현한다.

코야마 유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아즈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보다는 안전한 원작을 택한다’는 현재 일본 상업/장르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 준다. 창의적이고 신선하지만 상업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는 소재보다는 이미 인기가 검증된 만화나 소설, TV 드라마를 실사화/장편화함으로써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이러한 제작 풍토는 사실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동시에 일본 만큼 다양한 장르의 컨텐츠가 다른 형태의 미디어로 확대/재생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라도 드물다. 작년에는 인기 드라마의 극장판 <춤추는 대수사선 2: 레인보우 브리지를 봉쇄하라!>나 <키사라즈 캐츠아이: 일본 시리즈> 등이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올해에도 <캐산>, <큐티 하니>, <우미자루>, <데빌맨>, <시모츠마 이야기>, <철인 28호> 등 매스컴과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작품들은 대부분 원작의 각색물이며, 현재도 많은 만화와 소설, 애니메이션, 드라마가 실사화를 기다리고 있거나 그 과정에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안전 위주의 제작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장기 불황에 허덕이는 정체된 일본 사회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사회의 활력 저하는 새로움과 모험의 추구 보다는 안주와 향수를 자극하게 되고, 이러한 영향이 크리에이터로 하여금 복고적이고 친숙한 작품을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70년대에 주도적인 영상매체로서의 자리를 TV에게 완전히 빼앗겼고, 80년대 이후에는 헐리우드 외화의 초강세와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작가군의 부진으로 몸살을 앓아온 일본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도 한몫을 했다. 물론 키타노 타케시와 같이 해외 평단에서 호평을 받거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감독과 작품들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정작 자국인 일본에서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실사화’의 열풍은 다양한 장르 속에 엄청난 양의 컨텐츠를 채워 넣은 일본의 대중문화라는 창고에 신제품을 만들어 쌓아놓기 보다는 현재 보유한 재고를 계속 꺼내 쓰고 있는 상황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창의적 부진에 빠진 일본 장르영화의 미래는 과연 어둠 뿐일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정적으로 어두운 전망만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도권과 인디펜던트가 명확히 구분된 일본 영화계의 이중적인 구조가 뛰어난 장르영화를 생산할 수 있는 기초 토양을 구축하고 있다. 일본에는 어느 장르든 제도권 이외의 시장과 팬층이 든든히 존재하는데, 당연히 이들을 위한 컨텐츠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많은 영화인들과 집단도 있다. 이러한 인디펜던트의 인력들이 제도권에 편입되어 상업영화계의 젖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링>의 헐리우드 리메이크 이후, 현재 일본영화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장르인 공포영화야말로 이러한 ‘비주류의 저력’을 멋지게 증명하고 있는 경우이겠다. 최근 <주온>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헐리우드 진출까지 이루어 낸 시미즈 타카시 감독도 원래는 <주온>을 극장용이 아닌 비디오용 소프트로 출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항상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미이케 타카시, 이미 거장이 된 쿠로사와 키요시 등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공포영화 감독들도 독립영화계에서 경험과 내공을 쌓은 뒤 제도권으로 진출한 인물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르영화를 무기로 나타난 <아즈미>의 키타무라 감독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상업영화의 최고봉이 되어 헐리우드로 건너가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밝혔을 정도로 관객에게 철저히 서비스한다는 작품관을 갖고 있다. 장르영화의 핵심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키타무라 감독의 시각은 팔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철저한 경쟁의 세계에서 직접 몸을 부대끼고 터득한 지혜인 것이다. 초창기의 날카로움이 어느 정도 무뎌지기는 했지만, <아즈미>에서도 그의 재기 넘치는 연출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는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소재로부터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뽑아낸다(핏빛 장미를 물고 우아하게 일본도를 휘두르는 백의의 비죠마루!). 키타무라 감독의 독특한 영상 감각과 메이저 영화사의 자본이 행복하게 만난 결과로, 제도권 바깥과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영화계의 이중구조가 가져다 준 혜택이기도 하다.

일본의 장르영화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만은 없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과 변수가 존재하는 분야이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를 소비하는 다양한 취향의 관객층과 이들을 만족시키는 데 충분할 만큼 축적된 컨텐츠, 그리고 그 확대/재생산을 진두지휘하는 감독들의 존재가 일본 장르영화의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즈미>는 그러한 일본 장르영화의 특성이 하나의 작품에 모두 응축된 예이다.

키타무라 류헤이 (北村龍平)

1969년 오사카에서 출생. 17세 때 호주로 건너가 시드니 영상예술학교 영화과에 입학. 졸업 작품인 단편 <엑시트>가 연간 최우수 감독상과 코닥 어워드를 수상. 일본으로 돌아간 뒤 영화집단 네이팜 필름을 설립. 단 30만 엔의 제작비로 10일만에 완성한 액션 호러영화 <다운 투 헬>로 제1회 인디즈 무비 페스티벌 그랑프리를 수상. 이후 느와르 <히트 애프터 다크>를 거쳐 장편영화 데뷔작 <버서스>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음.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은 그의 최대 흥행작이며,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괴수영화 고지라 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 <고지라: 파이널 워즈>를 작업하고 있음. 이외에도 <지옥갑자원>(야마구치 유다이 감독)을 제작하였으며, TV 드라마 <스카이 하이>, 인기 비디오 게임 <메탈 기어 솔리드: 트윈 스네이크>의 데모 영상을 연출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 중.

작품목록
<다운 투 헬> (1997)
<히트 애프터 다크> (1999)
<버서스> (2000)
<얼라이브> (2002)
<잼 필름즈> (2002 / <메신저> 에피소드 연출)
<아라가미> (2002)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2003)
<스카이 하이: 극장판> (2003)
<고지라: 파이널 워즈> (2004년 12월 공개 예정 / 현재 촬영중)

– 브레이크뉴스에 실은 글. 게재된 날은 2004년 6월 26일이다.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다.

[핸콕] (2008)

(C) Columbia Pictures
(C) Columbia Pictures

수퍼히어로 존 핸콕은 LA의 골칫거리이다. 그는 주정뱅이에 성질도 더러운 민폐 덩어리여서 트러블을 해결하려다 자신이 트러블이 되고 마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바로 그 트러블 때문에 목숨을 건진 PR 전문가 레이가 보답으로 핸콕의 이미지 교정에 나선다. 핸콕은 점차 시민들의 신뢰를 얻어가지만, 한편으로 레이의 아내 메리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윌 스미스 영화이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반항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주인공이 어떤 상황이나 집단과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경쾌한 코믹 터치로 그리는 것이다. 배우의 이미지와 수퍼히어로 영화의 공식을 재치 있게 뒤튼 극중 상황은 템포가 좋고 시각효과도 훌륭하다(<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담당했던 존 다이크스트라의 솜씨이다). 그런데 문제의 중반에서, 영화는 관객의 예측을 아득히 초월하며 급선회한다. 당신들은 모두 낚였다. <핸콕>의 예고편은 <식스 센스>가 울고 갈 정도로 만선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가벼운 수퍼히어로 코미디는 심각하고 어두운 수퍼히어로 드라마로 갑작스럽게 진로를 바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대목에서 코미디로 시작했다가 억지 눈물 짜기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다시 코미디로 끝나는 숱한 한국영화를 떠올리며 잠깐 위기감을 느꼈다. 잔뜩 과장된 음악이 울려퍼지고 고양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한술 더 떠 이 영화에는 수퍼히어로의 적이 없다. 아니, 명목상의 적은 있지만 주인공이 싸워야 할 진짜 상대는 아니다. <핸콕>의 카타르시스는 기존 수퍼히어로 영화와 다르다. 관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호오가 극명하게 엇갈릴 만하다. 하지만, 수퍼히어로라는 존재가 기본적으로 ‘물 밖에 나온 물고기’임을 이해한다면, 핸콕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무엇인지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핸콕>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약간의 무리수를 둔 건 분명하다. 수퍼히어로의 내면에 처음으로 시선을 돌린 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예전보다 더 직관적이고 더 집요하게 피사체를 뒤쫓고 있다. 관객의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며 주제를 다루는 방법은 흥미롭다. 완벽하게 성공한 건 아니지만, 이런 수퍼히어로 영화가 하나쯤 있어도 재미있다.

원제: Hancock
감독: 피터 버그
주연: 윌 스미스, 샬리즈 테론, 제이슨 베이트먼, 제이 헤드, 에디 마산
북미 개봉: 2008년 7월 2일
한국 개봉: 2008년 7월 2일

[우주전쟁] (2005)

(C) Paramount Pictures, DreamWorks SKG, Amblin Entertainment, Cruise/Wagner Productions
(C) Paramount Pictures, DreamWorks SKG, Amblin Entertainment, Cruise/Wagner Productions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공포영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공포영화 감독보다도 스크린 속 공포를 잘 다룬다. 동시에 그가 다루는 공포는 매우 정형화되어 있어 이제는 그 수법이 뻔히 보일 정도가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주전쟁>의 도입부에서 벌어지는 외계인의 첫 습격 장면은 보는 이의 얼을 빼놓는다. 스필버그의 테러 묘사는 ‘공포를 다루는 법’이라는 가상 해설서의 황금 공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시각적 요소가 추가되어 매번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시점에서 <우주전쟁>은 역대 최고의 재난영화이며, 시각적으로 가장 뛰어난 괴수영화이다.

스필버그 영화의 원점은 그가 유년기에 매료되었던 문화 요소들이다. 그가 오슨 웰즈의 라디오 드라마 대본 원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우주전쟁> 역시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장르영화의 연속선 위에서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창작자가 당대의 현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명제를 굳이 들이밀지 않더라도, 이 영화에 9. 11 테러가 스필버그를 때리면서 남긴 충격과 분노의 흔적이 녹아있음은 너무나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외계인에 의해 무차별 파괴되는 시가지와 도망치는 군중의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세부는 9. 11 당시 우리가 실재함을 확인했던 것들이다.

묘하게도 <우주전쟁>은 그가 한 손에 블록버스터를, 다른 한 손에 진지하고 심각한 드라마를 들고 나오곤 했던 전력을 상기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가 그 둘을 합친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우주전쟁>은 <대결>이나 <조스>와 같은 스필버그 초기 걸작의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단순한 이야기에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이미지로 중첩된 장르영화의 거칠고 음산한 질감은 마치 1970년대로부터 2005년으로 곧장 건너뛴 듯 생생하고 힘이 넘친다.

스필버그 영화는 과연 진보적일까. 내가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바가 아닐지라도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스필버그는 <우주전쟁>으로 퇴보하지도 추락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그에 대한 찬반양론이 전례 없이 난무했던 이유는 <우주전쟁>이 불균질했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에게 ‘스필버그를 까야 쿨하게 보이거든’ 이라는 인식을 심는 평자와 논객들의 호들갑에 있다. <우주전쟁>에 대한 혹평 속에는 정작 영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헐리우드의 유대인 감독에 대한 반감이나, 이 영화에 들어맞지도 않는 미국 우월주의 운운만 있을 따름이다. 그자들은 바로 그 점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침을 튀겼지만,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결말이 불만스러운 관객이 많을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문화 현실이다. <우주전쟁>은 2005년 가장 확대해석된 영화들 가운데 한 편이었다.

원제: War of the Worlds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주연: 톰 크루즈, 다코타 패닝, 저스틴 채트윈, 팀 로빈스, 미란다 오토
북미 개봉: 2005년 6월 29일
한국 개봉: 2005년 7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