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 (2013)

(C) Warner Bros. Pictures, Legendary Pictures, Disney Double Dare You
(C) Warner Bros. Pictures, Legendary Pictures, Disney Double Dare You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 거대 괴수들이 지구에 재난을 초래하자, 세계 각국이 건조한 거대 로봇이 괴수들에 맞선다는 영화 <퍼시픽 림>(Pacific Rim)의 시놉시스는 발표되자마자 흥미 정도가 아니라 군침을 줄줄 흘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렸을 때 나의 눈과 귀를 붙들어 놓고 도무지 놓아 줄 생각을 않던 여러 가지 로봇 만화영화(이럴 땐 ‘애니메이션’보다는 ‘만화영화’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를 실사영화로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어 좀이 쑤실 텐데, 역시 그 시절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은 소중한 취미가 된 특촬-괴수영화의 요소까지 곁들여진다니 이거야말로 나를 위한 신나는 선물 세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는 몇 안 되는 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 그야말로 완벽한 3종 세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과연, <퍼시픽 림>은 기대를 전혀 배반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설마 여기까지, 이렇게까지 해 버렸을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이것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기와 격렬한 흥분으로 가득한 청룡열차 질주다. 엄청나게 크고, 기가 질릴 정도로 때려부수며, 혼이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청을 울린다. 지금까지 어느 헐리우드 영화의 액션도 <퍼시픽 림>이 도달한 곳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영화도! 게다가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델 토로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이 영화를 위해 그가 창조한 세계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점이다. 그 독특하고 기괴한 아름다움은 <퍼시픽 림>에 파괴를 주종목으로 삼은 다른 블록버스터들과는 다른 확고한 존재감과 독창성을 부여하고, 자칫 작품이 규모에 함몰될 수 있는 부작용을 막아낸다. 자신만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스펙터클을 선사할 줄 아는 델 토로식 블록버스터 가운데 <퍼시픽 림>은 대중친화적인 면에서 가장 성공적이다. 이쪽 장르를 사랑해 온 골수 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근래 여름 영화가 지나치게 어둡고 복잡한 구조로 점철된 탓에 피로감을 느껴 왔다면 <퍼시픽 림>의 직선적이고 장쾌한 정면 돌파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하튼 머리를 싸매는 대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신나게 볼 수 있다. 설정 상 속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에도, 떡밥 깔기보다는 이야기를 완결하는 데 오롯이 집중했기 때문에 속편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낚였다는 낭패감도 없다. 끝나고 나면 상쾌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될 것이다.

<퍼시픽 림>은 나를 다시 한 번 일곱 살 어린아이로 만들어 브라운관 TV로 만화영화를 보던,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눈에 불을 켜고 해적판 괴수대백과를 탐독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넘어, 아예 그 환상의 세계 속으로 직접 걸어들어가게 했다. 입체감과 공간감이 뛰어난 3D 화면과 아이맥스의 초대형 스크린은 그러한 ‘드리프트’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이다. 극중 거대 로봇인 ‘예거’를 조종하려면 두 파일럿의 기억을 공유시키는 과정이 필요한데, 기예르모 델 토로는 화면 속 파일럿들이 모르는 또 하나의 드리프트, 즉 화면 밖에 있는 나의 기억도 함께 ‘싱크로’해야 한다는 비밀 절차를 몰래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내가 기꺼이 뉴럴 브리지에 마음을 맡긴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경이로움을 다시 한 번 맛보게 해 준, 가슴 벅찬 순간의 연속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럼에도 이제 중년이 된 나는 ‘내가 드리프트 중이구나’ 라는 사실을 이따금씩 깨닫는 순간이 있다. 아무래도 플롯이나 등장인물의 묘사에서 전형성과 얄팍함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뒤에 이어질 전개를 비교적 쉽게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등장인물이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대부분 맞아 떨어진다. 특히 이쪽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몇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더 그럴 만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러한 단점쯤은 너그러이 봐 주고 싶다. 걸고 넘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따름이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쩌면 <퍼시픽 림>은 과거 로봇 애니메이션이나 괴수영화의 전형성마저 되살리고 싶어한 결과가 아닐까.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그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예거의 필살기나 괴수 디자인까지도 익숙한 데가 적지 않다. 그 위에 자신만의 장난기와 로봇과 괴수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쳐진 델 토로 터치가 어색하지 않게 덧씌워지니, 친숙하면서도 참신한 또 하나의 가상 세계가 탄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퍼시픽 림>은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실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영화가 된다.

별점: ***1/2 (넷 만점)

원제: Pacific Rim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주연: 찰리 허넘, 키쿠치 린코, 이드리스 엘바, 찰리 데이, 론 펄먼
개봉일: 2013년 7월 11일 (한국) / 7월 12일 (북미)
공식 웹사이트: pacificrimmovi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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