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2008)

(C) Warner Bros. Pictures
(C) Warner Bros. Pictures

전편 <배트맨 비긴즈>의 마지막 장면. 브루스 웨인은 오랜 방황과 고난 끝에 가섬 시를 위기에 몰아넣었던 악당 라즈 알 굴을 물리치고, 도시의 수호자 ‘배트맨’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새로운 악당 조커의 등장이 암시되고, 배트맨이 그를 찾아나서면서 영화는 끝난다. 약속 대로 속편인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에서 우리는 배트맨과 조커를 만난다. 조커는 얼마나 지독한 광기를 보여줄 것인가. 배트맨과의 한판승부는 얼마나 박진감이 넘칠 것인가. 그의 장비는 얼마나 멋지게 업그레이드될 것인가. 전편에서 소개된 등장인물의 운명, 특히 브루스와 레이첼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3년 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예상해 왔다.

<다크 나이트>는 좋은 의미에서 거의 모든 예상을 빗나간다. 전편에 이어 메가폰을 잡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번에도 수퍼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치는 과정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존재 의미를 되물으며 내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것은 전편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덕이었기에 속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놀라운 속편은 전편의 미덕을 이어받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더욱 깊이 파고들고, 더욱 넓게 펼쳐 보인다. <다크 나이트>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다.

배트맨의 등장으로 가섬 시는 변화를 겪게 된다.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도시의 모든 이가 엄청난 자극을 받은 것이다. 썩을 대로 썩었던 법 집행조직에서는 정의와 청렴을 지키려는 자들이 나타난다. 범죄조직은 큰 타격을 입고 위축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악랄해지고, 시민들은 자경 활동에 나선다. 도시는 얼핏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전보다도 더 위태로워진다. 배트맨은 가중되는 도시의 혼란과 음지를 전전해야 하는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의 비전을 실현시킬 후계자로 검사인 하비 덴트를 점찍는다. 여기에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 조커가 끼어든다. 조커는 극심한 변화의 난맥상 한가운데에 서서 치밀한 계획으로 혼란을 증폭시킨다. 배트맨의 이상은 점차 멀어져만 가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다크 나이트>는 가섬 시라는 가상의 사회 속에서 배트맨 / 브루스 웨인과 조커 그리고 하비 덴트라는 세 사람의 운명을 냉정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전편에서는 배트맨이 정의 구현을 위한 대쪽 같은 이상주의를 상징했다면 이번에는 그 역할을 덴트가 물려받는다. 분명한 목적에 따라 파괴를 자행했던 라즈 알 굴과는 달리, 조커는 철저히 악을 위한 악, 혼돈을 위한 혼돈 그 자체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할 거창한 대의가 없다. 단지 순수한 살인과 폭력, 파괴를 즐길 따름이다. 덴트와 조커의 각기 명확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배트맨의 위치는 애매하다. 덴트에게 배트맨은 유치장에 처넣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지지할 수만도 없는 존재이다. 조커에게 배트맨은 체스판의 말에 불과하다. 전편에서 배트맨이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겉모습 뿐이었음을, 관객은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배트맨은 가섬 시를, 가섬 시는 배트맨을 서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배트맨이 가섬 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한때 이상을 좇았던 그는 같은 이상을 공유했던 덴트의 파멸을 보면서 ‘딱딱하면 부러진다’는 말을 상기했을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을 통해 <배트맨 비긴즈>에서 그 단초가 제시되었던 수퍼히어로 영화의 리얼리즘은 <다크 나이트>에서 하나의 완성에 다다른다.

모든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를 선사하지만, 나 역시 다른 이들처럼 히스 레저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던,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인 갱스터 잭 니콜슨의 조커는 이제 없다. 레저(고인이 된 그에게 다시 한 번 명복을)는 단순한 악당을 넘어 광기 그 자체가 된다. 그의 연기는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별똥별과 같다. 그럼에도 그 빛은 우리의 망막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겨놓았다.

<다크 나이트>는 보는 이를 말 그대로 압도하는 영화이다. 원작 만화의 팬들은 그래픽 노블보다 더욱 그래픽 노블다운 작품의 구성과 표현 방식, 그리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실사화되었다는 사실에 압도당할 것이고, 장르영화 팬들은 주제와 형식이 거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 그 이전까지의 수퍼히어로 영화가 도달하지 못했던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에 압도당할 것이다. 배우의 팬들은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그들의 넘치는 활력에 압도당할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이 영화에 압도당할 것이다. 첫 프레임부터 마지막 프레임까지, <다크 나이트>는 진중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이 영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힘의 손아귀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원제: The Dark Knight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
주연: 크리스천 베일, 마이클 케인, 히스 레저, 애런 에커트, 매기 질렌할
북미 개봉: 2008년 7월 18일
한국 개봉: 2008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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